한국일보

탑 셰프의 추락, 노마 LA 2

2026-03-18 (수) 12:00:00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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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23년간 정교하게 쌓아올린 세계 최정상 셰프의 최후는 생각보다 빠르고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한 끼에 1,500달러짜리 팝업 레스토랑 ‘노마 LA’와 셰프 르네 레제피(Rene Redzepi)를 둘러싼 상황 변화가 지난 2주 동안 어찌나 극적으로 전개됐는지, 충격이라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불과 열흘전만 해도 노마LA에 대한 기대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덴마크 파인 다이닝의 성지, 5년 연속 미셸린 3스타를 받았고 굴지의 ‘세계 50대 식당’에서 다섯 번이나 1위에 오른 세계최고 식당이 LA에서 넉달간 팝업 레스토랑을 연다고 했을 때, 미식가들은 줄을 대기 시작했고, 예약 오픈 60초 만에 모든 자리가 절판되었다.

그런데 3월7일, 실버레이크의 유서깊은 저택에 마련된 식당을 오픈하기 닷새 전, 뉴욕타임스가 셰프 레제피의 과거 직원 학대전력을 고발하는 기사를 내보낸 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 기사는 노마의 전 직원이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고발 내용을 보고, 타임스가 노마에서 일했던 35명을 인터뷰한 후 작성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레제피는 2009~2017년에 직원들을 주먹으로 때리고 소리지르고 주방도구로 찌르거나 벽으로 내동댕이치곤 했다.

이에 더해 공개적인 조롱과 망신주기를 일삼았고, 자신의 영향력으로 식당가 블랙리스트에 올리겠다거나, 가족들까지 강제 추방시키겠다고 위협하는 등, 직원들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 폭력과 언어폭력으로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심지어 영업시간 중에는 손님들이 볼 수 없는 카운터 밑에서 직원들을 찌르고 꼬집고 때렸다니, 거의 정신병자 수준이 아니었나하는 의심마저 든다.

기사가 나온 다음날 3월8일, 레제피는 “나의 리더십과 잘못된 판단, 분노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깊이 사과드리고, 그동안 변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라는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3월9일, 노마LA의 주요스폰서였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블랙버드(고급레스토랑 로열티 프로그램), GM 캐딜락 등의 기업들이 후원을 철회하고 구매했던 티켓을 취소했다.

논란은 갈수록 증폭되었고 3월11일 오프닝 첫날, 식당 정문 앞에는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그러자 결국 레제피는 모든 책임을 지고 레스토랑 운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그가 설립한 비영리 요리단체 MAD의 이사직에서도 사임한다고 말했다. 다만 오랫동안 준비해온 LA의 레지던시는 노마의 팀이 맡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확인했다.

세계 최정상의 셰프가 뉴욕타임스 기사 하나로 며칠 만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놀랍고도 슬프다. 요식업계에서 레제피는 단순히 셰프가 아니라 혁명가이고 록스타였으며, 셰프들이 추앙하던 신과 같은 존재였다. 완벽을 향한 그의 강박과 집착으로 노마는 현대 미식의 메카가 되었고, 그 공로로 덴마크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았다.

그런 그가 미국 최초의 팝업 장소로 LA를 선정했을 때, 이곳 요식업계는 성은이라도 입은 듯, 마치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유치하기라도 한 듯 감격과 흥분에 호들갑을 떨었었다.


그러니 전세계 셰프 지망생들이 노마에서 일해보려고 줄을 서는 것은 당연한 일, 노마 주방에는 매년 120명의 새로운 인턴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수천 명의 지원자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 3개월간 무급으로 일할 수 있는 특권을 얻은 ‘행운아’들이었다.

하지만 그 행운은 일을 시작하자마자 사라졌고, 며칠만에 도망치는 인턴들이 적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폭행과 학대가 일상인 나날을 견뎌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배우는 것은 새로운 맛이나 요리 테크닉 같은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노동이었다. 매일 몇 시간이고 허브를 따거나 수천 개의 호두를 까거나 똑같은 요리를 ‘조립’하는, 식당을 돌아가게 하는 값싼 노동력의 제공자일 뿐이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새로운 것도 아니다. ‘흑백요리사’에 나온 한국 셰프들도 일본이나 미국의 유명 식당에서 일하기 위해 몇 달이고 무보수는 물론이고 청소나 설거지만 하면서 버틴 이야기들을 상당히 많이 들을 수 있다.

요리업계에는 오래전부터 브리가드 드 퀴진(brigade de cuisine)이라는 군대식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상명하복, 절대복종 문화 때문에 과도한 노동, 신체적 위협, 폭언과 망신, 심지어 성희롱 등이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곤 한다. 그래도 참고 견디는 이유는 유명 셰프 밑에서 일했다는 경력 한 줄이 젊은 요리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10~15년 사이에 요식업계에도 미투 운동이 불고, 내부 고발과 언론 보도가 늘어나면서 이같은 관행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는 있지만, 쉽게 고쳐질 성질의 문화는 아닌 듯하다.

요리사 세계에는 “주방에서 고된 노동과 갈등을 견뎌내는 법을 배우는 것 또한 업무의 일부”라는 인식이 퍼져있고, “고통을 견딘 사람이 진짜 요리사”라는 무용담이 통용되기 때문이다.

무급 노동력으로 쌓아올린 제국, 노마와 레제피의 추락은 지금 유럽에서 더 큰 화제라고 한다.

파인 다이닝의 허상을 알게 될수록 소박한 식당, 정직한 밥상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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