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평화를 구걸하는 자와 핵을 과시하는 자

2026-02-26 (목) 02:58:14 리정호 VA, 전 노동당 39호실 고위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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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18일, 한국의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군사분계선 인근 비행금지구역 재설정을 포함한 ‘9·19 남북군사합의'의 선제적 복원을 발표했다. 한국정부는 ‘신뢰구축'을 명분으로 일방적으로 문을 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북한 김정은은 600mm 초대형 방사포(KN-25) 50문 증정식에 참석해 발사대 차량을 직접 운전하며 대한민국 전역을 핵으로 초토화하겠다고 위협했다. 한국이 내민 손에는 합의서가 들려 있었고, 북한이 쥔 것은 핵 망치였다. 이 장면 하나가 오늘의 한반도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김정은은 KN-25를 두고 “전술 탄도미사일의 정밀성과 위력에 방사포의 연발 사격기능을 완벽하게 결합한 초강력 공격무기"라고 규정했다. “특수한 공격, 전략적인 사명 수행에도 적합화 되어 있다"는 표현은 사실상 핵 운용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시사한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체계는 4축 바퀴차량에 5연장 발사관을 탑재했다. 사거리는 약 400km로 한반도 전역이 사정권에 든다. 50문이 동시 발사될 경우 최대 250발이 순식간에 쏟아질 수 있다. 북한은 항재밍 기능과 복합유도체계, 인공지능기술 도입까지 주장하며 정밀성과 전장 생존성을 함께 과시했다. 방사포 조차 이제 전략무기 범주에 올려놓은 것이다.

▲김씨 정권의 본질 “통일은 오직 핵 무력뿐이다"


나는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성명 직후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중앙당 강연의 내용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나는 북한에서 대흥무역총회사 총사장으로 재직하던 시기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을 떠난지 불과 사흘 뒤, 강연 연사는 김정일의 지시를 이렇게 전달했다.

“남조선 괴뢰 대통령 김대중에 대해 조그마한 환상도 가지지 말라. 그는 우리의 선군정치 위력에 겁을 먹고 흰기를 들고 찾아와 무릎을 꿇은 것뿐이다." 이어 고위간부들에게 전달된 말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어차피 통일은 핵 무력에 의한 통일밖에 없다. 조금도 경각성을 늦춰서는 안 된다."

이것이 북한 세습정권의 변하지 않는 본성이다. 그들에게 대화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무너지는 체제를 지탱할 자금을 확보하고, 더 강력한 무기를 개발할 시간을 버는 전술적 기만. 6·15 공동선언 이후 네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수십 차례의 실무회담이 있었지만, 그 사이 북한의 핵능력은 비약적으로 고도화됐다. 수십 년의 역사가 이를 반복해서 증명했음에도, 우리는 같은 환상을 되풀이하고 있다.

▲비행금지구역 재설정 “스스로 눈을 뽑는 행위"

정동영 장관이 발표한 ‘9·19 군사합의 선제적 복원'의 핵심은 군사분계선(MDL) 인근에 기종별로 세분화된 비행금지구역을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2018년 합의기준에 따르면, 무인기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동부 15km·서부 10km, 정찰기와 전투기는 동부 40km·서부 20km 이내 진입이 금지된다. 헬기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10km, 기구는 25km가 그 한계선이다.

한국 정부의 논리는 접경지역에서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고, 도발 빌미를 차단하며 대화 채널을 복원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처참히 무너진다. 북한은 2018년 합의 이후에도 GPS 교란, 무인기 침투, 오물풍선 살포 등 크고 작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MDL 인근에서 한국군의 무인기와 정찰기, 전투기 접근을 스스로 제한한다는 것은 적의 기습을 탐지해야 할 ‘눈'을 자진해서 뽑는 행위이며, 유사시 제때 대응할 수 없게 만드는 군사적 자살행위다.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최전선 장병들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방어역량을 필연적으로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적만 이롭게 할 뿐이다. 북한군의 방사포 50문이 단번에 수 백개의 탄두를 쏟아 부을 수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 군의 감시와 조기대응 능력을 스스로 거세하는 것은 평화 정책이 아니라 안보 포기다. 핵으로 무장한 적대 정권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이는 조국을 수호할 의지조차 저버린 행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김정은은 더 위험한 계산을 한다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보다 더 노골적이고 더 과감하다. 그는 사거리 400km에 달하는 초대형 방사포, 중단거리 탄도미사일, 드론, 전술핵 운용체계를 실전 배치하며 서울의 도심과 주요 인프라, 군사시설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그는 더 이상 모호한 언어 뒤에 숨지 않는다. 핵은 협상카드가 아니라 실전무기라는 점을 이제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이 상황에서 ‘9·19 합의'라는 낡은 종이 조각이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과 동떨어져있다. 약함은 존중을 얻지 못한다.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 상대는 대화가 아닌 압박을 선택한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평화는 굴종이다

진정한 평화는 선의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오직 힘으로만 지켜진다. 압도적 억지력과 그것을 행사할 의지가 있을 때만 상대는 계산을 다시 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지금 해야할 일은 합의문을 꺼내드는 것이 아니라 억지력을 재건하는 것이다. 한미연합훈련의 완전한 복원과 독자적 감시·정찰능력의 강화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전략적 필수과제다. 김정은이 도발의 대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판단할 때만, 그는 비로소 협상 테이블로 나올 것이다. 힘이 없는 선의는 순수한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조국을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가 된다.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평화를 지킬 힘을 길러야한다. 그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그리고 우리가 아직도 배우지 못한 교훈이다.

<리정호 VA, 전 노동당 39호실 고위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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