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플로리다의 겨울

2026-02-26 (목) 12:00:00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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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다운 겨울이 없는 플로리다도 올해는 추운 날이 평소보다 길었다. 새해 첫날부터 영하로 내려가더니 지금까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그런 날이 계속되고 있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상수도 파이프가 터지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

우리 식당도 앞 길에 있는 소화전이 터져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었다. GRU에서 나와 금방 고칠 것처럼 큰소리치더니 몇 시간이 지나도 물길을 잡지 못하고 쩔쩔맸다. 덕분에 우리 식당을 비롯한 그 구간의 모든 사업체에 물이 공급되지 못했고, 오후까지 기다리다 그만 그날은 영업을 접어야 했다.

그래도 이 추위가 싫지만은 않다. 이십여 년 전에 볼티모어에서 이사 왔을 때는 겨울에도 우리는 반팔로 살았다. 한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볼티모어의 날씨로 보면 초가을 날씨였다. 맑고 상쾌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가을의 향을 만끽했다. 비록 눈부시게 타오르는 단풍이나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의 풍치는 없었지만,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신선한 공기와 12월을 지나서 1월과 2월이 다 가도록 겨우내 볼 수 있는 푸른 나무들은 사뭇 환상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낮에는 여전히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여름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아침에는 추워서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 집을 나서지만, 차 안에서는 금방 더워져 에어컨을 틀어야 했다. 그나마 한 여름의 그 땡볕 더위는 아니니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그 날씨를 ‘겨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올해는 겨울 다운 겨울을 만난 셈이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날 아침에 차 유리가 성애로 하얗게 덮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플로리다에서는 볼 수 없던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날은 거리에서 두꺼운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움츠리고 걷는 것이 보았다. 겨울 다운 겨울이다.

가끔은 한국의 겨울이 그립기도 하다. 가을인가 하면 벌써 겨울이 들이닥치던 서울의 거리가, 찬 바람을 타고 우왕좌왕하다 내려앉던 나뭇잎의 행진, 발끝으로 낙엽을 툭툭 차면서 한없이 거닐던 그 길이 가끔은 애틋하게 떠오른다. 쓸쓸함으로 가득했던 나의 청춘이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을 맞으며 골목에 서 있다.

구세군 종소리 울리던 명동의 분주한 거리, 화려한 거리마다 출렁거리던 크리스마스 캐럴, 그 리듬만큼 들뜬 발길과 저마다 들고 있던 크고 작은 선물들, 정성껏 포장한 마음이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벙긋벙긋 웃고 있다. 벌거벗은 나무들이 층층이 껴입은 얼음 옷과 엄마가 짜준 빨간 목도리와 벙어리 장갑도 그립다.

캐시미어실을 사서 스웨터를 짠다. 가는 실로 곱게 짠 스웨터는 플로리다의 겨울에 안성맞춤이다. 가장 가는 바늘을 사용하니 1인치 짜는 데 몇 시간씩 걸린다. 두 달은 족히 걸려야 완성할 듯하다. 한 땀 한 땀 그리움을 섞어가며 떠나간다. 엄마가 목에 걸어 주던 포근한 목도리와 오빠들이 건네주던 크리스마스 선물과 앞마당에서 연탄을 굴려 만들던 눈사람을 함께 뜬다. 고향의 겨울이 담긴 스웨터를 입을 생각에 마음이 급하다. 어서 짜서 입고 거리로 나서고 싶다. 여름을 품은 플로리다의 겨울에 고국의 겨울을 한 땀씩 담아내고 있다.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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