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요단상] 청계천을 흐르는 빛의 기억

2026-01-23 (금) 12:00:00 이희숙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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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에서 맞는 성탄절이다. 매서운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어 옷깃을 세우지만, 마음속에는 꺼지지 않는 온기가 있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을 기다리는 설렘이 나를 문밖으로 나서게 했다. 청계천 불빛 행렬이 보였다. 청계천은 북악산과 인왕산 품에서 가느다랗게 태어난 물길이 서울의 심장을 뚫고 조용히 흐르는 곳이다. 동쪽으로 몸을 틀어 마침내 중랑천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시간을 안고 흐른다. 조선 하늘 아래에선 자연 그대로 하천이었으나 태종의 손길이 닿아 물길은 ‘개천’이라 불리며 백성의 삶을 지켜 주는 길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은 늘 평탄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더러워진 물은 이름마저 청계천으로 바뀌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삶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되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6·25 이후, 천 주변에는 판자촌이 들어서고 물길은 더러운 하수도로 변해 갔다. 1960년 콘크리트로 덮이고 청계고가도로가 세워지며 물은 기억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흐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랜 침묵 끝에 2000년대 초, 다시 햇빛을 만난 청계천은 도시의 상처를 씻어 내며 시민의 발걸음과 쉼이 머무는 공원으로 되돌아왔다. 콘크리트를 뜯어내고 물줄기를 끌어 올려 생명을 살렸다. 하얀 날개를 편 백로가 물속을 살피다 물고기를 낚아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풍부한 생태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물길은 지금도 말없이 흐른다. 서울이 걸어온 시간과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물소리에 실어 오늘로 데려왔다.


2026년 붉은 말 해, 병오년을 맞이하여 청계천을 따라 빛들이 줄지어 서 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펼쳐진 전통과 현대의 조화된 서울 빛초롱축제다. 한지 등(燈)과 LED로 이루어져 ‘나의 빛, 우리의 꿈, 서울의 마법’으로 펼쳐졌다.

1887년 어느 밤, 경복궁 건청궁에 처음 밝혀졌다는 전등 빛이 다시 살아났다. 그 작은 불빛은 어둠을 밀어내며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붙들었을 것이다. 옛사람들이 넋을 놓은 채 기적 같은 순간을 바라보았듯, 나 또한 한동안 말없이 서서 빛이 태어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어둠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간절함은 이야기가 되어 이어졌다.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가 남긴 일화 속에서 빛은 단지 환함이 아니라 삶을 가다듬는 마음과 의지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촛불과 등잔,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밤을 건너왔다.

이윽고 전차가 등장하며 빛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일 위를 달리는 불빛은 도시의 꿈을 싣고 흔들리며 나아갔다. 고요히 머물던 빛은 이제 사람과 함께 이동하며 세상을 넓혀 주는 동반자가 되었다.

이어 시선은 안쪽으로 향했다. 내 안에 숨은 반짝임, 말하지 못한 꿈들이 비밀스러운 빛으로 깨어났다. 그 빛은 우주의 심연으로 번져 오로라가 되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며 잠시나마 다른 세계를 선물했다.

시간이 흐르며 서울의 빛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 세계가 주목하는 매력을 발했다. 케이팝과 이야기가 만나 세계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상상력은 인공지능의 손을 빌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얼굴을 그려냈다. 빛은 더 이상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도시의 개성과 욕망, 그리고 가능성 그 자체였다. 뉴욕 자유의 여신상, 영국의 빅벤이 눈앞에 펼쳐졌다. 멀지만 친숙한 도시 빛에 손을 흔들며 군중 속에서 나왔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작지만 또렷한 빛 하나가 여전히 환하게 흐르고 있다.

<이희숙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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