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정치적 싸움은 실상 그다지 많은 것을 통제하지도 못하는 입법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다. 행정명령을 앞세운 대통령 중심의 통치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의회는 국가를 움직이는 핵심 권력 기관이라기보다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 심지어 의회는 스스로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졸속으로 반복되는 예산 편성 과정만 봐도 그렇다. 이런 현실에서 유권자들이, 매 2년마다 사실상 중요하지도 않은 입법자 후보들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공허한 정치 의식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유권자들은 이미 여러 차례 이 불행한 권력 구도를 바로잡아 왔다. 2006년, 2010년, 2018년, 2022년 중간선거에서 반복된 선택은 하나였다.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연방 상·하원을 동시에 장악하는 구조를 끝내는 것이었다. 이 구도는 사람들이 자주 잊지만, 대체로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아왔다. 당의 무기력한 의회 다수에 거의 제약받지 않은 대통령과 함께한 지난 1년을 경험한 뒤, 유권자들은 오는 11월 선거에서 다시 한 번 최소한의 견제와 균형이라도 회복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분할 정부다.
오늘날 정치에서는 정당 충성심이 입법자들의 제도적 자부심을 압도하고 있다. 의회라는 기관 자체에 대한 존중보다, 당의 이해관계가 앞선다. 그렇기에 미국 헌정 질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매디슨식 구조, 즉 권력 분립과 상호 견제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분할 정부 외에 다른 해법이 없다. 정치사상가 유발 레빈이 말한 “의도적으로 비협조적으로 설계된 정부 시스템”은, 단일 정당 지배 아래에서는 기능할 수 없다.
지난 수십 년간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더라도 분할 정부는 오히려 미국 사회의 현실을 가장 정확히 반영하는 형태다. 1984년 로널드 레이건이 월터 먼데이를 18%포인트 차로 이긴 이후, 압도적 승리는 사라졌다. 그 이전만 해도 닉슨은 맥거번을 23.2%포인트 차로, 존슨은 골드워터를 22.6%포인트 차로 이겼다. 그러나 1984년 이후 최대 격차는 1996년 빌 클린턴의 8.5%포인트 승리에 불과했고, 평균 승리 격차는 4.6%포인트에 그친다. 1988년 이후 대통령 후보 중 2008년 오바마의 53% 득표를 넘긴 인물도 없다.
197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알파벳 순서에 따른 차별을 막기 위해 주 호명 순서를 일부러 뒤섞었다. 알파벳 순서가 불공정하다는 논리였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 장면을 지켜본 미국 사회가 아니라, 그 결정을 내린 민주당이었다.
오늘날 민주당은 대명사 문제에 집착하고 있고, 공화당은 그 순간 대통령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믿는다. 50년 동안 지속돼 온 무역적자가 어느 날 갑자기 국가 존망을 위협한다는 주장까지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두 정당의 ‘광기 지수’는 이제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선거 역시 극적인 변화보다는 전국적인 ‘어깨 으쓱임’, 즉 팽팽한 균형을 반영할 가능성이 크다. 중간선거가 통상 현직 대통령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띠고, 경제와 이민 등 핵심 이슈에서 대통령의 부정 평가가 긍정을 웃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블루 웨이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2018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하원 의석 40석을 늘렸다. 그러나 불과 8년 만에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정교해진 게리맨더링과 극단적 양극화로 인해, 쿡 정치 보고서의 에린 코비는 2024년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가 승리한 지역구를 대표하는 공화당 하원의원이 단 3명뿐이라고 지적한다. 트럼프가 5%포인트 이하로 이긴 지역구를 대표하는 공화당 의원도 10명에 불과하다.
1980년대에는 약 20여 개 주에서 서로 다른 정당 소속 상원의원이 한 명씩 있었다. 지금은 메인,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단 세 곳뿐이다. 미국은 양극화가 심화되는 동시에 이념적으로는 기묘한 수렴 상태에 들어섰다. 양당의 가장 격렬한 분파가 쏟아내는 거친 수사는, 실제로는 정치가 ‘모방의 정치’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가리고 있다. 전통적 진보주의자들과 전통적 보수주의를 경멸하는 새로운 보수주의자들은 실제 정책보다는 말로만 서로를 적대한다.
미국경제연구소의 줄리아 R. 카트라이트는 이른바 ‘신우파’라 불리는 집단이 “포퓰리즘의 단순한 도덕 드라마를 완벽히 익혔다”고 지적한다. 진보 진영은 오랫동안 정치적 갈등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몰아왔다. 사악한 ‘억압자’와 고결한 ‘피억압자’라는 구도다. 이제 가짜 보수주의자들은 고결한 ‘국민’과 부패한 ‘엘리트’라는 구도를 내세우며 이 수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유권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의 도덕극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신중한 유권자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시간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다. 이들은 누가 오늘 권력을 쥐느냐보다, 권력이 내일 오용될 때 피해를 최소화할 제약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둔다.
올해 유권자들은 분할 정부라는 제약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의회가 어떤 모습으로 전락했는지에 진심으로 혐오감을 느끼는 인물들을, 양당에서 동시에 의회로 보낼 수도 있다. 그것이 중간선거를, 적어도 조금은 덜 불쾌하게 만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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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F·윌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