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레디 코어(Ready Core)의 해를 맞으며

2026-01-08 (목) 12:00:00 이리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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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병오년(丙午年), 이른바 ‘붉은 말’의 해다. 십이간지에서 말은 움직임과 도전을 상징하고, 오행에서 ‘병’과 ‘오’는 모두 불의 기운을 품는다. 그래서 병오년은 뜨겁고 힘차다. 예로부터 붉은색은 복을 부르고 액운을 막는 색이라 여겨졌다. 올해 태어나는 아이들은 말띠가 되고, 세상은 그들을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존재로 기억할 것이다. 새해의 이름부터가 앞으로 나아가라고 등을 떠미는 듯하다.

작년, 나는 삼십 년을 다닌 직장을 떠났다. 희망퇴직이라 불렸지만, 그 말 속에 담긴 희망이 무엇이었는지는 선뜻 알기 어려웠다. 결코 가벼운 선택은 아니었다. 직장이 평생을 책임져 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등을 돌릴 수 있는 곳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래 몸담았던 시간과 관계들이 한순간에 정리되는 일은 생각보다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권고 사직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길은 결단이라기보다 한 발 물러섬에 가까웠다.

그 무렵 계절은 오월이었다. 꽃이 계절의 얼굴이 되는 때였지만, 나는 그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봄을 누리고 있었고, 나는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시간이 갑자기 많아지자 마음은 불안해졌고,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감에 초조해졌다. 그러다 가로수 잎이 떨어지기 시작할 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한 자리를 오래 지켰다는 사실만으로 인생이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멈춤은 끝이 아니라 방향을 고르는 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마침 2026년을 설명하는 말로 ‘레디 코어(Ready Core)’가 등장했다. 준비된 중심. 이는 완벽함이나 흔들리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중심을 품고 있다는 뜻에 가깝다. 준비된 사람은 잠시 멈춰도 무너지지 않고, 길이 바뀌어도 다시 방향을 잡는다.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계획하고 배우며 스스로를 단단히 세운다. 여행도, 일상도, 삶의 중요한 결정들까지 미리 준비하는 시대다. 준비는 더 이상 조심스러움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힘이 되었다.

병오년의 말은 불의 기운을 타고 달린다. 그러나 말은 무작정 질주하지 않는다. 고개를 들고, 땅을 살피며, 발굽에 힘을 모아 앞으로 나아간다. 레디 코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완벽한 대비가 아니라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중심인지도 모른다. 준비가 부족한 날에도, 불안이 스며드는 시간에도, 그 하루를 살아낸 내가 중심이 되는 일 말이다.

새해가 왔다. 새로운 계획은 아직 없다. 다만 모든 것을 갖추지 못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보고 싶다. 계획이 비어 있는 날에도, 길이 선명하지 않은 순간에도,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로 충분하지 않을까.

붉은 말이 달리는 이 해에, 멈춰 있던 마음은 다시 움직이고 주저하던 발걸음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한다. 더불어 2026년이 모두에게 힘차고 복된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이리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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