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타국에서, 다시 ‘우리’를 생각하다

2026-01-06 (화) 12:00:00 황의경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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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도미했던 15여 년 전, 미주 한인사회에는 일종의 카스트 제도가 존재했다. 말 그대로 시민권자, 영주권자, 체류 비자 소지자, 신분이 없는 사람들 간에 보이지 않는 부러움과 무시, 다양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많았고, 일자리가 넘쳐났기에 신분이 없어도 일할 곳은 많았다. 그 시절 먼저 자리 잡고 살았던 올드타이머들은 신분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해결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올드타이머들이 갈고닦아 놓은 한인타운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과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 모두 새로운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LA 한인타운은 지금보다 북적였고, 때로는 시끄러웠지만 한편으로 역동적이었다. 이민자들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막는 지금과 비교하면, 기자는 아마 한국에서 유입인구가 많았던 시절의 마지막 이민 1세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우리 한인들은 시민권, 영주권, 불체자 등 신분의 차등 없이 ‘이민자’라는 하나의 프레임 속에 놓여버렸다. 물론 이 프레임이 모든 이민자에게 불합리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이민 정책과 정부의 가시 돋친 발언들은 이민자들을 움츠러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문에서 이민자들의 증가로 미국의 집값이 올라가면서 미국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민자라는 한 프레임 안에 갇혀 있어도, 우리 한인들은 좀처럼 하나로 뭉치기 힘든 것 같다. 오히려 유입인구가 많았던 시절, 신분이 없어도 품어줄 데가 있었던 그때보다 요즘은 더 팍팍해진 분위기다. 신분이 있는 사람들은 현 행정부의 이민자 핍박을 남의 일처럼 눈감고 받아들이고, 신분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음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다. 기자와 친분이 있는 한인 미혼모를 돕는 한 단체의 대표는, 한 신분이 없는 미혼모의 사정을 전하기도 했다. 그녀는 중병을 앓고 있는 상황임에도 신분 때문에 병원에 갈 수 없고, 자식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혹자는 “음지로 숨지 말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겠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 일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고, 터놓고 말 못할 수많은 사연 속에서 뿌리 내리고 살아온 삶의 터전을 바꿔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닐 것이다.

불법체류자를 옹호하려는 것도, 그렇다고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역만리 타국에서 살고 있다는 큰 공통점을 가진 미주 한인으로서, 새해에는 조금만 더 ‘우리’라는 단어가 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로를 이해 못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측은지심으로 이해하고 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그런 미주 한인사회를 갈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한인사회가 좀 더 크고 단단해져야 할 것이다. 이민자들로 이뤄진 미국에서, 각 가정과 지역 사이에 존재하는 커뮤니티는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베트남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교사로 일하는 지인이 해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들은 사업이 어려워지면 신문에 광고를 내고, 그러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물건을 사주고 도움을 준다고 했다.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의 어려움을 본능적으로 나누고, 필요할 때 모여드는 연대감. 부러운 일이었다.

모두의 희망으로 밝아 온 2026년 새해, 기자는 우리 한인사회가 서로의 차이를 넘어 하나로 설 수 있기를 바란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2세와 3세 세대가 초기 이민자들이 닦아놓은 삶의 기반 위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하며, 서로 기대고 힘을 나누는 지속 가능한 커뮤니티를 만들어가길 희망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필요할 때 함께 모여 어려움을 나누고 지탱할 수 있는 공동체, 그런 믿음과 연대가 살아 있는 한인사회가 되기를 기자는 소망한다.

<황의경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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