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야기 가득한 ‘조선의 명화’ 읽기

2025-12-30 (화) 07:57:53 최규용 교수 (메릴랜드대 화학생명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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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성부도(秋聲賦圖)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가을의 소리) 국립중앙박물관

이야기 가득한 ‘조선의 명화’ 읽기
사랑하는 님 떠나시니 내 마음 둘 곳 없다
조선팔도 산천경개 볼 때마다 감탄이요
금강산 그림 보며 무릎 치며 기뻐하셨네

엄위한 화성행차(華城行次) 잘 그렸다 칭찬하고
잘못한 일 있었건만 사랑으로 용서하사

환호와 찬탄이 덧없음을 알겠노라
가신 님 사모하며 내 마음 달래보네


단원 김홍도는 도화서원으로서 정조(正祖)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항상 긴장 속에서 정사(政事)를 보아야 했던 정조는 단원의 그림을 보며 일편(一片)의 한가로움과 즐거움을 얻었으니 단원은 정조가 나라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정(善政)을 베푸는 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정조는 중인(中人) 신분의 단원을 충청도 괴산의 연풍 현감으로 임명했는데, 화가로서는 탁월했지만 행정가로서는 부족했던 그는 상소(上疏)로 인해 결국 3년간의 현감직에서 파직되었다. 그 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1800년)으로, 단원은 정조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무상의 허망함을 견디지 못했고, 말년을 가족과 떨어져 살다가 가난과 병마 속에서 외롭게 생을 마쳤다.
보물 1393호로 지정된 <추성부도>는 단원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805년에 그린 마지막 걸작품으로, 중국 송나라 구양수(1007-1072)의 시 <추성부(秋聲賦)>, 즉 ‘가을의 소리에 대하여’라는 내용을 화폭에 옮긴 시의도(詩意圖)이다.
쓸쓸한 가을밤, 구양수는 책을 읽다가 밖에서 나는 스산한 소리를 듣고 동자에게 밖에서 나는 소리가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동자가 밖에 나갔다 오더니 구양수에게 말하기를,

星月皎渽(성월교재) 별과 달 환히 빛나고
明下在天(명하재천) 밤하늘엔 은하수가 걸려있습니다
四無人聲(사무인성) 사방에 인적은 없는데
聲在樹間(성재수간) 나무 사이에서 들려오는 소리뿐입니다

그러자 구양수가 “아아! 슬프도다, 이것이 가을의 소리구나”라고 읊었다. <추성부>는 ‘사방의 벽에서 들려오는 가을벌레 소리만이 끊임없이 계속되면서 나의 무량한 감개와 탄식을 도와줄 뿐이다’라고 맺는다. 찬란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구양수의 깊은 감회를 표현했으니, 김홍도가 그의 말년에 느낀 정서와 공명(共鳴)하는 것이었다.
단원은 이 그림에서 갈필(渴筆, 물기가 거의 없는 붓)을 사용하여 메마른 가을 산 사이의 작은 초가에 앉은 쓸쓸한 모습의 구양수를 그렸다. 멀리 보름달이 떠있는 숲을 가리키는 동자, 커다란 괴석(怪石), 흩날리는 낙엽, 휘어진 앙상한 나뭇가지, 달빛 아래 고요히 서있는 두 마리의 학. 이 모든 것은 인생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 단원의 고독과 허무함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러나 단원이 병약한 몸임에도 그림에 써넣은 <추성부> 전문(全文)의 단정한 글씨는 그의 꼿꼿한 의지를 보여주어 보는 이를 감동하게 한다.
결코 허망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조선 최고의 천재적 화가로서의 빛나는 인생을 살았던 단원이었건만 고적한 인생의 말년에 느끼는 소회가 이 그림에서 절절히 느껴진다. 지금을 사는 우리가 나이 들어 인생을 돌아볼 때 마주하는 감정이 단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걸출한 예술가였음에도, 단원의 묘소조차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그림이 담고 있는 인생무상의 주제를 더욱 비극적이고 애잔하게 만든다. (워싱턴 DC의 Sackler Gallery에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서 이 그림을 볼 수 있다) joseonkyc@gmail.com

<최규용 교수 (메릴랜드대 화학생명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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