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평선] 독재자도 사로잡은 비만치료제

2025-12-30 (화) 12:00:00 양홍주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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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푸틴 대통령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유럽 최장기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다. 그는 국경을 개방해 푸틴이 키이우 북쪽에서 젤렌스키 군대를 공격할 루트를 열어줬다. 심지어 자국 내 러시아 전술핵무기 배치를 허용하고, 푸틴에게 정유공장과 철도망을 보급 인프라로 넘겨주기도 했다. 크렘린을 일대 위기로 몰았던 프리고진 쿠데타를 배후에서 잠재운 인물 또한 루카셴코였다.

■루카셴코는 서방과 철벽만 친 인물이 아니다. 크렘린이 나토와 모종의 접선을 벌이는 데 있어 통로 역할도 했다. 크림반도 병합에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2015년 수도 민스크에서 정전협정도 중재했다. 외신들은 “유럽 내 유일한 러시아 우군이면서 서방과 접점을 유지해준 창구”라고 그를 평한다. 강온 모든 수단을 동원해 푸틴을 도와온 것이다. 이랬던 그가 어찌 된 영문인지 이달 초 트럼프 대통령 요청을 받아들여 정치범 등 123명을 전격 석방했다.

■푸틴 복심인 그가 느닷없이 트럼프 뜻대로 움직였던 배경에 궁금증이 일던 즈음, 흥미로운 소식이 들렸다. 지난 6월 벨라루스에 파견된 미 트럼프 대통령 특사가 루카셴코를 설득할 협상 수단으로 비만치료제 젭바운드를 동원했고, 효과를 봤을 것이란 뉴스(월스트리트저널)다. 이게 사실이라면 서방 비만치료제가 철옹성 같은 독재자 마음도 움직일 만큼 매력적이었단 얘기다.

■세계보건기구는 1일 젭바운드 등 GLP-1 계열 최신 비만약들을 통한 치료 지침을 내놨다. 살을 빼줄 뿐 아니라, 심혈관질환을 억제하는 효과가 탁월해 사용을 권고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치료제는 장기 복용이 필수이면서 상당한 고가다. 그래서 이 약이 제공할 혜택은 빈자들에겐 그림의 떡일 수 있다. 이들 비만치료제가 지닌 가장 큰 부작용은 건강 불평등 심화라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엔 국내에서도 저소득층에 대한 비만치료제 건강보험 적용 목소리가 높다. 문제는 제한적인 건보재정이다. 탈모약도 비만치료제도 모두 감당하기엔 턱없이 역부족일 것이다.

<양홍주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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