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치는데 어쩔꺼여! 그럴 땐 우산도 소용 없어. 그냥 지나가길 기다려야지. 얼른 집가서 뜨끈한 거 먹고 푹 자.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면 돼!”
20년 전쯤 삶의 첫 암흑기를 겪었다. 남편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사업을 한다고 밖으로 돌았다. 의지와는 별개로 되는 일은 없었고, 생의 불안이 엄습했다. 게다가 아이는 막 초등학생, 8학군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전쟁같은 일이었는데...
너무 답답해서 동생이랑 점을 보러 갔다. 잠실에 용하다는 단재 할아버지였는데, 이제 삼십대 초반인 젊디젊은 애엄마들을 퍽 안스러운 눈으로 봐주셨다. 낡은 책을 펼치고 생년월일을 묻고 볼펜으로 한자들을 막 쓰시더니, 사주 너무 좋다고, 관상도 너무 너무 좋다고, 아무리 좋아도 늘 좋을 순 없다고, 그러니 견뎌야하는 시절도 있는 거라고, 조금만 버텨보라고, 집 가서 맛있는 밥 먹고 푹 자라고.
딱히 용한 건 모르겠지만 마치 우리 외할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두런두런 이야기 해주셨다. 중년 이후는 복덕이 그득할거라고 사주팔자를 알아듣기 쉽게 풀어가며 설명해 주셨는데, 그 시절 나는 당장 오늘이 괴로워 죽겠는데 무슨 중년이야, 너무 멀고 아득했다.
그렇게 생의 소나기에 흠뻑 젖어도 결국 지나갔다. 쨍하고 햇빛 빛나는가 싶더니, 잔뜩 흐려 눈도 쏟아지고, 다시 개인 하늘... 인생이 영락없이 계절 같았다. 설렘 기쁨 슬픔 고통이 날씨처럼 순환하고, 좋다고 붙잡아도 오래 머물지 않았고, 영영 안만났음 싶어도 다시 돌아왔다.
단재 할아버지는 점쟁이가 아니라 순리의 수호자였다. 이후 일년쯤 지나 퍽 밝아진 마음으로 다시 찾아갔는데... 그만 돌아가시고 안계셨다. 감사의 말을 드리러 간터라 마음이 풀썩 주저앉았다. 인생이 느리고 힘겨운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새 시간이 휙휙 흘러 중년이 됐다. 그 때 단재 할아버지 말대로 사주가 좋아서 지금 편하게 산다고 생각진 않는다.
아마도 그 할아버지는 찾아오는 모는 힘든 사람들에게 그리 얘기해줬을 것이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삶의 동앗줄이 되기도 하니까. 할아버지. 예언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끔 소나기에 옴팡 젖어도 햇살 좋을 때 마음 널어말리고 저녁엔 따뜻한 밥 먹고 잘 자면서요.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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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영 (주)즐거운 예감 한점 갤러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