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에세이] 부석사,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보다
2025-11-19 (수) 12:00:00
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
‘고색창연하다’를 만나서 울고 싶어지는 건 뭘까.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에 가서 무량수전을 마주하고 배흘림기둥에 기대서니 그러했다. 676년에 지어진 이 목조 건축물이 지닌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표현을 찾다가 떠오른 말이다.
‘고색창연’은 중국 시인 소양의 ‘서산사’에서 유래된 사자성어로 알려져 있다. 오래되어 예스러운 풍치나 모습이 그윽하다, 시간이 흐르며 쌓인 아름다움과 분위기를 표현한다, 오래된 빛깔이나 색채에서 옛것이 품고 있는 깊이와 폭이 나타난다 등 의미가 조금씩 다른 듯 비슷하다.
2000년대 초반에 지금은 작고하신 최순우 선생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고 꼭 가보리라 언젠가는 가보리라 결심했는데 그 언젠가가 2025년 가을이 될 줄이야.
선생께서 쓰신 무량수전과 그 주위 경관에 관한 글 한 대목이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선생의 글을 오마주해서 2025년 가을 그날의 풍경과 정취를 나름대로 표현해 본다.
소백산 남쪽 능선 부석사의 한낮, 알록달록 사람들 물결이 오색 단풍처럼 흘러 다닌다. 안양루 돌계단을 올라오니 무량수전이 나를 맞아준다. 낡지만 단단하고 바래어도 주눅 들지 않은 자태와 색의 호젓한 아름다움, 나는 잠잠이 붙박이가 된다. 두루미가 날개를 펼치고 막 내려앉은 듯한 지붕 처마 끝, 그 처마 아래로 둘러 입힌 색은 몰캉한 홍시물을 발라 놓은 듯, 치자를 풀어놓은 듯. 몇 발짝 물러서서 보면 아름다운 색감이 더욱 선연하다. 빗줄기 같은 세월을 두른 채 당당하고 넉넉한 배흘림기둥 그 흙빛 표면을 쓰다듬으며 목수의 손끝을 상상한다. 배흘림기둥 하나하나 상처를 살피며 무량수전 사면을 빙 돌아 앞마당으로 다시 나온다.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멀리 소백산 자락을 바라보면 멀찍이서 보아야 깨달아지는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된다. 조응하고 호응하는 이 모든 아름다움의 의미를 오랫동안 곱씹게 되리라.
아미타여래를 모신 법당 입구 댓돌 주위로 신발이 수북하다. 신발의 주인들은 어떤 지혜를 채워 돌아갈까. 나는 법당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른 데로 발을 떼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다.
부석사로 올라가는 초입에 가을을 옮겨 놓은 은행나무 가로수 길. 물든 잎들이 몸을 포개어 강물처럼 흐르는 길. 목적지에 이르러 마지막 발자국을 내딛으면 노란 인주가 찍힐 것만 같은 길, 그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언젠가는 겨울의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풍경의 여백을 찾아보리라.
포르르, 노랗고 빨간 잎들 여남은개가 차 안에서 흩어졌다. 리플렛 속에 끼워 두었던 은행잎과 단풍잎이다. 집어 드는 마음은 어느새 꼬리가 된 길을 되짚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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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