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셔에서] 빛바랜 사진
2025-11-06 (목) 12:00:00
허경옥 수필가
장 정리를 하다가 사진 한 장이 선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이들이 옛날 사진을 찾는다고 앨범을 뒤적이더니 그때 떨어져 나온 모양이다. 끝이 누렇게 변하기 시작한, 오래된 흑백사진이다. 그 안에서 영이가 환하게 웃고 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결혼은 했을까? 자녀는 두었을까? 여군에 입대한다고 훌쩍 떠나버린 그때 그 길목에 영이의 시간은 멈추어 있다.
영이는 아주 밝고 씩씩한 아이였다. 늘 큰언니 같은 얼굴로 우리들의 일상을 리드했다. 학업 성적은 물론 노래도 잘 부르고 운동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친구였다. 우리 누구도 영이의 삶에 짙은 그늘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누구보다 쉽게 취직할 것 같았던 영이는 의외로 면접에서 계속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평소 가고 싶어 했던 대기업의 면접시험을 치른 날 그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찬 바람이 거리를 휘젓고 다니던 늦가을이었다. 영이는 창가에 서서 점점 흐려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 참 침묵하다 결심이라도 한 듯 불쑥 말을 꺼냈다. 나 … 사실은… 고아야.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아라는 그 단어의 무게가 그녀의 삶을 얼마나 고되게 했을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창밖에는 어느덧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리를 적시는 빗방울이 그녀의 뺨에도 흐르고 있었다. 오늘 우리 집에 갈래? 어색함을 깨기 위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날 밤 영이는 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겪었던 힘든 이야기를 띄엄띄엄 해주었다. 그 기막힌 일들을 남 이야기하듯 별다른 감정 없이 털어 놓았다. 어쩌면 너무 무섭고 아픈 과거라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많은 재산을 삼촌과 고모가 대리인 자격으로 가져갔는데 끝내는 그들에게서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하고 버려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나는 물어볼 수 없었다.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다음 날 제집으로 돌아가며 영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음에는 엄마가 살아계시다고 할 거야.
그래서 그랬을까 영이는 그 시험에 합격했다. 수심을 거둔 영이는 다시 밝은 얼굴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첫 월급을 탄 날 영이는 내복 한 벌을 사 들고 우리 집에 왔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내미는 내복을 엄마는 차마 받지 못하고 눈물부터 훔쳤다. 서둘러 저녁상을 차린 엄마는 맛있게 먹는 영이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일찍 퇴근하는 토요일 오후에 우리는 자주 어울렸다. 종로 서적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영이가 느닷없이 전화로 입대 소식을 알려왔다. 아니 왜? 어떤 파도가 밀려와 그녀를 어디로 끌고 갔는지 지금도 모른다. 그렇게 영이는 우리들의 세계에서 사라졌다.
이제는 세월의 서리를 이고 있을 영이가 아직도 어린 얼굴로 빛바랜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결혼은 했는지? 아이들은 몇이나 두었는지? 이제는 진정 평온한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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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옥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