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慶州)에 다녀왔다. 경사스럽고 복된 고을.
며칠 전까지 나는 “와라, 가을아.” 이병헌 주연의 영화 속 대사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시월하고도 중순인데 부산은 여름옷을 부르는 날씨가 이어졌다. 7월 25일부터 8월 22일까지의 기간에 윤달이 든 탓에 여름이 늘어나서 그렇단다. 그랬는데 하룻밤 사이 가을이 왔다, 거짓말처럼.
엘에이를 떠나기 전부터 부산에 오면 친정엄마와 가을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이제 가을이 도착했으니 우리 모녀는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노모의 허리 상태를 고려하여 우선 가까운 경주에 가자고 중지를 모았다. 몇 달 전에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를 보면서 생각했고, APEC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도시 경주가 궁금하기도 하였으므로.
경주는 친정에 온 느낌을 주었다. APEC 정상회담을 알리는 현수막과 깃발들이 나부끼는 사이로 나지막한 한옥 건물들과 거리 환경을 정리하는 인부들의 차분한 움직임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예상치 못한 빗줄기가 작달비로 쏟아져서 비 구경이나 할 판이라고 툴툴거렸는데, 경주 톨게이터를 통과하자 언제 왔냐는 듯 비가 그쳤다.
점심 식사 후, 노모는 커피와 달달한 황남빵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첨성대를 보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나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APEC 홍보영상 속에서 요리사가 하얀 접시에 첨성대를 담아서 내놓는 장면이 어른거려서 미룰 수가 없었다. 장면마다 인상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내가 실물을 직접 영접할 수 있는 건 첨성대뿐이니 어쩌겠나. 첨성대를 향하는 중에 천마총과 대릉원을 거쳤다.
대릉원에서 왕릉에 둘러싸여 걸었다. 둥근 침묵이 푸르게 흐르는 곳. 죽은 자의 숨결이 산 자의 발걸음에 얹어져 속삭이는 곳. 산만한 무덤에 압도되고 곡선에 매료되는 곳. 옅은 가을비 속에서 더욱 선연하게 다가오는 세월의 흔적을 따라 한없이 걷고 싶었다.
잔디에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을 무시한 당돌한 까치 한 마리가 꼬리를 세우고 왕릉 비탈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귀여워서 사진 찍는 동안 나의 늙으신 엄마 또한 작은 새가 되어 걸어가고 있었다. 선처럼 가늘어지고 있는 뒷모습을 연속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길치인 내가 혼잣말로 ‘이렇게 쭉 가면 첨성대 가는 길이 맞나?’ 중얼거리는 소리를 유모차 밀고 가던 여인이 들었나 보다. “네, 맞아요. 근데 이리로 말고 저리로 가는 게 더 빨라요.” 응대를 하는 게 아닌가. 말투는 일본인 같은데 길을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태도와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왕릉 사이를 산책하는 여유로움이 돋보여서 좀 놀라웠다. 아, 경주는 산책하듯 나와서 무덤 사이를 거닐고 천 년 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숨 쉬듯 느끼며 살 수 있는 곳이구나.
발에 쥐 난다, 앉았다 가자, 화장실 가자, 옥신각신하면서 첨성대에 도달했다. 초등학생 그룹이 인솔자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귀를 열고 뒤쪽에 슬쩍 끼어들었다. “맨 위에 얹어져 있는 사각형은 각각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키는 겁니다. 알겠지요? 1,300년도 지난 옛날에 만들어졌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정말 대단하지요?”
나는 속으로 답했다. 네, 맞아요. 정말 대단해요. 근데, 첨성대 뒤편에선 아무도 사진 안 찍나요? 똑같이 1,300년 넘게 살아냈는데 말이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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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