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로 ‘이슈’를 덮는 트럼프 스타일 발동한 것일 수도
▶ 직접 회동제안 대신 ‘김정은이 연락하면’ 전제 달며 리스크 완화 시도
▶ “北은 일종의 뉴클리어파워” 언급했지만 ‘핵보유국 지위 인정’까진 안 나가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만난 북미정상 [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4일 아시아 순방길에 나서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깜짝 회동'에 대한 기대를 피력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다시 첨예해진 미중 갈등, 앞이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외교, 평화구상 2단계 진입을 앞두고 위기에 직면한 가자 문제, 그리고 4주차를 맞이한 연방정부 일시적 업무정지(셧다운) 사태 등 트럼프에겐 현재 국내외 난제들이 산적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계기에 29∼30일(이하 한국시간) 방한하기로 한 상황에서 트럼프 방한 외교의 하이라이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집권 2기 첫 정상회담이 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무부 등에서 북미회담을 진지하게 준비하고, 북측과 관련 소통을 했다는 정황은 그동안 드러난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의 회동에 대한 기대를 피력한 것은 '이슈'로 '이슈'를 덮고, 남들이 좀처럼 하지 않는 일을 함으로써 주목받길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성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 미국산 대두 수입 중단 등의 카드를 꺼내며 공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30일 부산에서 열릴 시 주석과의 회담에서 중국의 큰 양보를 얻어내는 '외교적 승리'를 거두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또 3천500억 달러(약 500조원) 대미 투자금을 둘러싼 한미간 이견 속에 29일 경주에서 열릴 한미정상회담 계기에 한미간 무역협상이 최종 타결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깜짝 회동'을 언론의 톱뉴스로 만듦으로써 아시아 순방 이후 제기될 수 있는 각종 논란 또는 비판을 우회하길 원할 수 있어 보인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만나자고 제안하기보다는 '그(김 위원장)가 연락한다면 만나고 싶다'는 식의 다소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상황의 미묘함을 의식한 데 따른 것으로 읽힌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1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3차 회의 때 "개인적으로는 현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며 "만약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한 데 기초하여 우리와의 진정한 평화 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북한 관영매체들에 보도됐다.
'북한 비핵화를 포기하고,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는 가운데, 북한과 평화공존을 하려 한다면 트럼프 대통령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메시지였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적극적, 주동적으로 김 위원장에게 회동을 제안할 경우, '또 한번의 판문점 북미회동'을 '비핵화 없는 북미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김 위원장의 의도에 말려들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음을 트럼프 대통령도 의식했을 수 있어 보인다.
즉,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만나자고 하면 만나겠다'는 다소 어중간한 메시지를 냄으로써 회동 이후 그 내용에 따라 제기될 수 있는 '왜 만났느냐'는 식의 비판에 대한 '방어 기제'를 마련해두려 한 것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나중에 자신이 비판을 받을 상황이 오면 '때마침 다자 정상회의(APEC)가 한국에서 열렸고, 김 위원장이 굳이 만나자고 하기에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만났다'는 식으로 피해 갈 구석을 마련해 둔 것으로 볼 여지가 있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일종의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라고 언급한 대목도 김 위원장의 '기대'를 일정 부분 충족시키되, 완전히 선을 넘지는 않음으로써 나름의 절충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은 미국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뉴클리어 파워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한다'는 기자의 언급에 답하면서 "그들(북한)이 뉴클리어 파워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글쎄, 나는 그들이 핵무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답을 했다면 그것은 북한 비핵화에 대한 '포기선언'으로 해석됨으로써 큰 파장을 부를 수 있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그 선까지는 넘지 않았다. "핵무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며 북한이 핵무기를 가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취지로 답함으로써 자신의 기존 대북 발언의 수준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