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는 이야기] 나르시시즘(narcissism) 이야기

2025-10-14 (화) 07:36:33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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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 멋에 산다.”라는 말을 자주한다. 아마 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마음이 인간의 마음 저변에 자리 잡고 있기에 그래도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게 만드는지 모른다.

하다못해 한사람 몫을 온전하게 감당하지 못하는 거지나 노숙자에게도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고 논리가 있고 제 멋이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드라마가 있고 희극과 비극이 있고 사연과 곡절이 있는 법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르시스, 또는 나르키소스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사춘기를 지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다. 나르시스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만 바라보다가 그 얼굴을 사랑하던 나머지 연못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는 정말 못 말릴 자기애(自己愛)의 결정판이다.


그 후 연못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은 나르시스의 넋이 꽃으로 환생했다 하여 그 꽃 이름을 나르시스, 수선화라고 부쳐주었다는 별 감동 없는 이야기도 있다.

자기 용모에 반한다는 것만큼 어리석고 엉뚱한 일은 없다. 그런데도 그 엉뚱한 도취가 인간 속에 있다는데 아이러니가 있다. 정도 이하로 자신을 비하하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자신을 중심에 두고 일희일비하는 모습은 웃기다할 만치 측은하다. 그러나 희한한 일은 그런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간들로 이 세상은 거의 채워져 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자기애에 빠지는 경향이 농후하므로 이를 경계해야한다. 나르시스란 결국 자신을 미화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신이 애국자라고 외치는 나르시시즘 중독자가 사실은 사기꾼일 확률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잖은가. 이 말을 바꿔 말하면 그런 자기애에 빠진 사기꾼과, 모순과 역설의 주인공들이 이 사회의 얼굴노릇을 하고 있거나 하려드는 해괴한 일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하여 나르시시즘을 질타하고 고고한 삶을 살아가는 디오게네스의 후예들은 과연 훌륭한가. 그들은 방관자요 국외자로 머물러있을 뿐이니 그들의 무관심은 결단코 나르시시즘을 이겨낼 수 없다는데 페이소스가 있다. 그래선지 이제 온 세상은 나르시시즘으로 가고 있다.

너도나도 인플루언서(Influencer)가 되겠다고 혈안이 되었다. 내일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이 시대의 자기애는 천길만길 절벽위에 서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나르시시즘은 유명인으로만 국한 할 수도 없다. 어쩌면 인간 자체가 그런 속성을 지녔기에 슬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속성 때문에 모두가 삶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연못에 일그러진 얼굴을 비추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아! 왜 이렇게 나는 잘 난 거야!”

연못 속에 비친 자신의 표면적 얼굴이 아니라, 그 얼굴 안에 각인된 내면의 나를 보아야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현명하지 못하다. 내가 나를 잘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그것이 자칫 내가 나에게 빠지는 우매함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인간들의 허무한 자기 우상화의 모습이다.


사람은 별 것도 아닌 자기 이름을 우상으로 삼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처절하게 매달릴 수가 없다. 어딜 가든지 그런 우상에 빠지고 탐닉하는 모습을 보면 “경이(驚異)로움”을 넘어 경탄(驚歎)에 도달한다. 어떤 이는 차지할 명예를 위해 자신의 학력 경력 배경을 늘 짊어지고 다닌다. 늙고 병 들면 무거워서 어찌할지 궁금하다.

연못에 비춰진 자기 얼굴은 늘 그 모습이 아님을 깨달아야한다. 참으로 환영(幻影)에 다름 아니다. 인간 삶에 나르시스는 필요한 자양분일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조금 더 짙은 자아를 위해 시선을 바꿔야한다. 연못보다는 조금 위를 보는 시야로 바꾸는 것은 어떤가.

망상과 자기도취에 머물러 있는 “철없음”에서 벗어나 정말 아름다운 자기를 발견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런 제안도 저 잘난 나르시시즘으로 분류될 수 있으니 주의할 일이다. 간만에 조수미님의 수선화를 들으며 가을의 정취를 맛보고 싶다.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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