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야기 가득한 ‘조선명화’ 읽기

2025-10-07 (화) 12:00:00 최규용(메릴랜드대 화학생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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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神仙)과 동자(童子)

▶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 <春南極老人> (봄의 남극노인) 간송미술관

이야기 가득한 ‘조선명화’ 읽기
신선 영감 가시는데 동자가 없을쏘냐
오늘도 착한 동자 천도(天桃)를 따왔구나

이거 오늘 먹으면 두 개째 먹는 거지
앞으로 또 한 천년 확실하게 살겠구나

하나만 더 따오면 두루마리 펼쳐주마


천도 두 개 따오면
보여 주신다면서요

신선 할아버지는
욕심쟁이 거짓말쟁이


오원 장승업은 영화 취화선(醉畵仙)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조선 후기의 직업 화가이다. 고아인 그는 역관(譯官)인 이응헌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그가 청나라에서 수집해 온 많은 그림을 어깨너머로 보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장승업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본 이응헌은 그가 그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큰 인기를 끌었고 그는 술을 좋아해서 술을 따라 준 기녀에게 술값 대신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또한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그림의 소재가 백성들과 친근한 것이 많았다. 일자무식 천민 출신인데도 고종이 그의 재능을 아껴 후원하였고 궁중화가로 명했는데, 이 그림은 오원이 고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그려 진상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그림 속의 신선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남극노인(南極老人)인데 남극선옹(南極仙翁)이라고도 하며 중국 고대 신화 전설 속에 등장한다. 남극은 수성(壽星)이 보이는 남쪽 지평선 끝을 의미하며 이 별을 보면 오래 산다고 옛사람들은 믿었다. 천도(天桃)는 먹으면 천년을 산다는 전설이 있는데 방금 따온 천도를 신선에게 바치는 그림 속의 동자는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삭(東方朔)일 것이다. 살짝 구부러진 늙은 소나무에 걸터앉은 신선이 긴 손톱의 오른손에는 신선의 권능을 상징하는 여의(如意, 뜻대로 된다)라는 나무 조각을 들었고, 왼손에 든 두루마리는 인간의 생몰(生沒) 날짜가 적혀있다는 도교의 경전인 황정경(黃庭經)으로 보인다. 황정경은 몸속의 정기와 신(神)을 수련하여 장생과 신선의 경지에 이르는 수양법을 기록한 경전이라고 전해진다. 이 경전에는 <紫氣浮雲生我身(자기부운생아신)>이라는 구절이 있다는데 이는 이 경전을 읽음으로써 ‘자줏빛 기운(신선의 상서러운 기운)이 내 몸에서 일어나는구나’라는 뜻이다.

이 그림에서 동자를 바라보는 마음씨 좋아보이는 대머리의 신선 표정이 약간은 익살스럽고 장난끼있게 그려져 재미있다. 동자는 신선의 상징이며 불로장생의 약재라는 영지버섯을 허리에 차고 있다. 남색, 청색과 주황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고 섬세하게 그려진 도포와 그 아래로 보이는 보라색 신발은 이 그림의 신선이 보통 멋쟁이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신선과 동자의 표정, 노송 하나만을 배경으로 한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 풍성하고 화려한 색감 등이 뛰어난 장승업의 명작이다.
joseonkyc@gmail.com

<최규용(메릴랜드대 화학생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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