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예전에는 가을이 그저‘가을’이었는데

2025-09-23 (화) 08:12:08 이근혁 패사디나,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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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오직 한 계절만 허락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을일 것이다.
예전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었다. 봄이 오면 꽃이 피는구나, 여름이 오면 덥구나, 가을이 오면 시원하구나, 겨울이 오면 춥구나. 그렇게 몸과 마음이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따라갔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별다른 생각 없이 계절에 나를 맡겨두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가을이 단순히 지나가는 계절이 아니게 되었다. 찬 바람에도 마음이 덜컥 흔들리고,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깊은 상념에 잠기게 된다. 이제는 마음이 바람 닿는 대로, 계절 바뀌는 대로 변하기보다 항상 가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가을바람에 마음이 실려 가면, 예전처럼 금방 돌아오지 않는다. 그곳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같은 시간, 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도 몸과 마음의 속도가 달라진 것을 느낀다. 몸은 계절의 흐름을 따라 늙어가지만, 마음은 쓸쓸함과 우울함이라는 가을의 색으로 이미 물들어버렸다.


단풍이 채 물들기도 전에,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기도 전에 내 마음은 이미 겨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가을이 좋다. 이 쓸쓸함이 좋다. 파란 하늘을 보며 깊어지는 외로움 속에서, 앙상한 가지만 남을 나무를 보며, 차가운 바람 끝에 올 겨울을 예감하며, 나는 어디에 어울리는 존재일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외로움이 쓸쓸함으로 변하고, 때때로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듯한 감정의 굴곡을 겪는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지금의 나인 것을. 천고마비의 계절에 몸은 마를지언정 영혼만은 살찌우며 보내야 하는데, 마음은 여전한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자꾸만 나를 잃어가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깊어질수록 내가 가야 할 길은 더욱 선명해진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가 보인다. 이 깊고 고요한 성찰의 시간을 나는 성숙과 감사함으로 부를 수 있을까. 아직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가을밤이다.

<이근혁 패사디나,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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