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요에세이] 가을을 누릴 때 필요한 것들

2025-09-10 (수) 12:00:00 임지영 (주)즐거운 예감 한점 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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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서문을 꼼꼼히 읽는다. 거기에 전체가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공들인 문장들이라고 느껴진다. 저자의 진심이 행간에도 가득차 있어, 곧 시작될 본문이 더 기대되는 것이다.

그림을 볼 때는 전시 서문을 먼저 읽지 않는다. 거기에 전체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고 느껴서다. 오히려 모호한 문장이라고 여겨질때도 있다. 향유는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라 몇줄 글로 규정될 수 없고, 다만 마지막에 하나의 견해로 읽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낯선 문화를 처음 맞닥뜨릴 때 우리는 약하다. 단어 하나에도 영향을 받고, 문장의 뉘앙스에도 예민해지는 존재다. 그래서 예술하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가 닿을 자리를 끝없이 생각해야 한다. 낯선 단어가 벽이 되기도 하고, 닫힌 질문 하나가 마음을 아예 닫아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예전에 서울시청 공무원 예술 특강을 한 적이 있다. 마침 길 건너 덕수궁 미술관에서 장욱진 전시가 퍽 인기였다. 나는 강의 중에 신난 나머지 질문을 했다.

“장욱진 전시, 많이들 다녀오셨지요? 점심 시간 커피 한잔 들고 길건너 다녀오심 되니까요. 전시 보신 분 손들어주세요!”

아뿔싸... 100명 가까운 분들이 있었건만 아무도 손드는 이가 없었다. 역시 서울시 공무원분들은 세상에서 젤 바쁘시죠! 눙치며 수습하느라 애먹었다.

책도 그림도 음악도, 읽고 보고 듣는 사람이 주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의 행위보다 사용자 경험이 우선하는 것. 향유 안에서 아름답게 소통하는 것이 목표지만, 외면받거나 오해되는 것도 수용해야 한다. 예술은 추앙이 아닌 취향의 영역이니까.

지금 하고 있는 예술 강의에 미술 지식과 정보는 최소화한다. 그림에 대한 정보가 많고 설명이 길수록 자기만의 향유를 하는데 방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지적 만족과 교양 축적을 위해 예술에 다가오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예술을 교양과 지식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독 선진국의 미술관에서 고령자나 장애인 등 취약한 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분들이 교양을 쌓기 위해 미술관에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술관이라는 시공간이 주는 특별한 경험과 더불어 그 곳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대화들. 가령 그림을 보고 떠오른 내 인생의 한장면이라거나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처럼, 미술관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사회의 문화 복지며 필수 요소인 것이다. 어느새 가을이다. 삶을 누리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좋아하는 책 한 권 품고 그림 한 점 보러 간다면 당신도 이미 인생 향유자다.

<임지영 (주)즐거운 예감 한점 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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