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Second chance’

2025-09-04 (목) 12:00:00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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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은 모두 퇴근한 시간에 가게 문을 나서려던 남편은 멈칫했다. 가게 입구에 흑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이미 자정이 다 된 시간, 넓은 주차장은 짙은 어둠만 가득하고 남편의 차만 한 대 동그마니 남아 있었다. 그가 어떤 위험 요소를 안고 있는지 몰라 선뜻 나서지 못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남편에게 그는 불쑥 일자리를 달라고 했다.

“Can you give me a second chance?”

의아해하는 남편에게 그는 몇 달 전에 우리 가게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노숙자임을 속이고 가짜 연락처를 적어 고용되었는데 술에 취한 채 일하러 와서 그날로 주방장에게 해고당했단다. 그가 노숙자의 삶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이해한 남편은 다음날 깨끗한 옷을 입고 열 시에 온다면 일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24시간 영업하는 월마트에서 옷을 사라고 돈까지 주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주방장은 그가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혹시 일하러 오더라도 며칠 못 가 그만둘 것이라고 했다. 시간과 돈만 낭비할 것이 뻔하니 그런 사람들은 제발 고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열 시 오 분 전에 깨끗한 셔츠를 입고 일하러 왔다. 이번에 주어진 기회를 발판으로 노숙자 삶을 꼭 청산하고 말겠다는 듯, 그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다. 돌아서면 쌓이는 그릇들을 닦아 내느라 두 손이 물에 퉁퉁 불어도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그가 묵을 방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범죄 기록도 있고 신용불량자인 그에게 방을 내주는 아파트는 한 군데도 없었다. 며칠을 가게 앞에 있는 모텔에 그를 묵게 하며 남편은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끝에 드디어 방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아주 허름한 곳이었지만 그는 자기만의 공간을 얻은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른다며 울먹였다.

그렇게 그는 진창 같은 그의 삶에서 마른자리로 넘어오는 것 같았다. 두 달 가까이 성실히 일하던 그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점차 지각하는 횟수가 잦았고, 근무 시간에 사라져 나가 찾아보면 가게 근처 나무 밑에 상주하는 노숙자들과 섞여 한가하게 잡담하고 서 있었다. 그를 믿지 않았던 직원들은 그거 보라고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시간과 돈과 사랑을 낭비한 거라고 남편의 순진함을 비웃기도 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노숙자가 된 그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남편은 그를 도와준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녹록하지 않은 그의 삶 속에서 잠시라도 따뜻한 도움을 받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거리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짐을 나르는 남편을 발견하면 달려와 손을 보태기도 하고, 불쑥 가게로 들어와 남편을 끌어안으며 고마웠다고 인사도 한다. 이제 서른을 막 넘긴,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다. 너무 늦지 않게 그가 다시 새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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