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요에세이] 허만 멜빌의 지식을 펼쳐 놓은 박물관

2025-09-03 (수) 12:00:00 이현숙 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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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 멜빌은 도서관의 책을 섭렵하고, 바다를 누비며 체험을 갈무리해 ≪모비 딕≫을 썼다.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뉴 베드퍼드 포경 박물관이다. 건물을 감싸는 대왕오징어 모형은 향유고래와의 끝없는 싸움을 상징하는 듯했다. 광장에 놓인 작은 향유고래 조각상은 소설 속 ‘바다의 왕’과는 달리 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 위에서 미끄럼을 타며 웃는 모습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고래를 일상의 동무로 바꾸어 놓는다. 그 옆으로는 대왕고래 꼬리가 하늘로 치켜세워져 있었다. 무지개빛 물보라를 흩뿌리는 장면이 떠올라, 마치 인간에게 겸허함을 일깨우는 교훈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압도적인 고래의 세계가 펼쳐졌다. 200년의 포경 역사가 넓은 전시장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다섯 구의 고래 골격은 바다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오른 듯 장엄했다. 특히 어미 참고래와 새끼가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은 생명의 끈질긴 연속을 말해 주는 듯해 가슴이 먹먹해졌다. 블루웨일 골격 앞에 서니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절로 실감났다. 성인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심장은 고래가 품은 바다의 깊이를 보여 주는 듯했다.

세계 최대 포경선 라고다 모형은 갑판 위로 흰 돛을 펴 올리며 바다로 달려 나갈 듯했다. 작살을 던지고 밧줄을 붙잡는 인형들의 절박한 표정은 삶과 죽음이 맞붙던 순간을 생생히 전한다. 향유고래의 두툼한 턱뼈와 그 안에 담겼던 기름 덩어리는, 인간의 욕망이 바다의 거인을 쓰러뜨렸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2층 전시실에는 고래 뼈로 만든 지팡이, 수천 점의 스크림쇼가 가득했다. 항해의 고독 속에 새겨진 작은 그림들이 이제는 섬세한 예술품이 되어 관람객을 멈춰 세운다. 그 앞에서 오래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예술은 때로 죽음의 흔적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당시 고래기름은 세상을 밝히던 등불이자 문명을 움직이던 에너지였다. 하지만 눈부신 불빛 뒤에는 고래의 희생이 있었다. 멜빌은 그것을 누구보다 똑바로 바라본 사람이었다. 그의 소설은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바다와 고래, 인간의 탐욕과 숙명까지 담아낸 거대한 기록이었다. 박물관을 걸으며 나는 책 속 문장이 전시장 유리 너머에서 다시 살아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는 모든 향유고래가 죽음 앞에서 태양을 향한다고 썼다. 사람은 고향을 바라본다는데, 고래의 고향은 태양일까. 어쩌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비밀의 본능이 그들을 이끄는지도 모른다. 노을빛이 고래의 골격 위로 스며들자, 바다가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나 역시 멜빌과 같은 시선으로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식과 경험, 그리고 상상의 힘이 그와 나를 이어 주는 듯했다.

의자에 앉아 저무는 해를 바라보았다. 멜빌이 남긴 문장, 고래가 남긴 뼈, 그리고 바다가 남긴 침묵이 겹쳐졌다. 그 순간 박물관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깊은 사색의 공간이 되었다.

<이현숙 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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