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H마트에서 울다’ 읽고 울다… 낸시의 ‘뿌리 찾기’

2025-07-29 (화) 12:00:00 노세희 부국장대우ㆍ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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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

한국계 미국인 가수 겸 작가 미셸 자우너의 회고록 ‘H마트에서 울다’는 엄마의 부재와 모국어의 상실을 한국 음식으로 이겨낸 이야기다. 이 첫 문장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뿌리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감정의 물결을 불러일으킨다.

LA 출신 한인 혼혈 여성 낸시 고넨도 이 책을 읽고 울음을 삼켰다. 그녀에게도 ‘엄마의 음식’은 곧 한국이었고, 그 기억은 오래도록 그녀의 마음 한켠을 지켜준 유일한 고리였다. 이제, 낸시는 오래전 한국을 떠난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오는 9월 강원도로 향한다.


낸시의 어머니 고 이월선씨는 1933년 강원도 춘성군(현 춘천시) 상걸리에서 태어났다. 1955년, 미군으로 복무하던 얼 루이스 소렌슨과 결혼한 뒤 서울에서 장녀 루이스를 낳고 곧 미국으로 이주했다. 1957년 LA에서 차녀 낸시를 출산한 이씨는, 낸시가 22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그날 이후, 낸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언어도, 문화도, 가족도 단절된 삶 속에서 그녀가 붙잡을 수 있었던 마지막 끈은 어머니가 남긴 한국 음식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기억은 시간 속에 희미해지지 않고 남아, 마침내 그녀를 뿌리의 여정으로 이끌었다.

최근 낸시는 책상 서랍 깊숙이 보관돼 있던 오래된 영문 호적등본을 꺼냈다. 먼지 낀 서류 속에는 어머니의 본적지, 조부모의 이름, 결혼 당시 주소들이 적혀 있었다. 춘천시 상걸리 52번지, 홍천군 홍천읍 와동리 663번지. 낡은 문서 속의 숫자와 글자가 그녀에게는 생명줄 같았다.

현재 이스라엘에 거주 중인 낸시는 오는 9월 18일, LA에 사는 두 딸과 함께 강원도를 찾는다. 어머니의 생가를 방문하고, 혹시라도 살아 있을지 모를 친정 가족과의 재회를 간절히 소망한다. 지난 6월 11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과거를 통해 내 정체성을 재건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연합뉴스, 강원도민일보 등 국내 언론도 그의 사연을 주목했고, 조선일보도 그녀의 한국 방문에 맞춰 인터뷰를 요청한 상태다. LA 총영사관과 가주 강원특별자치도 도민회가 그 여정에 힘을 보탰다. 낸시는 현재 한국계 가족사를 연구하는 브리검영대 마크 피터슨 명예교수, 서울의 신채용 교수 등과 협력해 친가족 찾기의 실마리를 좇고 있다.

“엄마와의 연결고리를 찾는 건 단지 나만의 여정을 넘어서, 두 딸에게도 뿌리와 정체성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낸시는 그렇게, 세대와 국경을 넘는 여정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다시 써내려가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미셸 자우너가 책 속에서 보여준 감정의 진폭을 떠올리게 한다. 한 그릇의 한국 음식, 하나의 오래된 주소가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LA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에 거주하며 줄곧 ‘뿌리’에 대한 갈망을 안고 살아온 한 여성의 여정은 이제 강원도로 이어지고 있다.

문학이 보여준 공감의 힘은 낸시에게 현실이 됐다. 그 마지막 장면이 ‘H마트에서의 눈물’을 넘어, 한국 땅에서의 따뜻한 만남으로 완성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 소중한 여정을 통해 그녀가 자신의 삶에 남은 마지막 퍼즐을 완성할 수 있기를 아울러 응원한다.

<노세희 부국장대우ㆍ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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