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중궁전(中宮殿)의 여인들

2025-05-22 (목) 04:10:10 최규용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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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무르익어 초여름이 시작되는 5월은 목단(牧丹)이 만발하는 계절이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우리 집 앞의 작은 화단에서는 세가지 색의 목단꽃이 만개하여 조선시대의 중궁전(中宮殿)이 펼쳐진 듯 궁중 여인들의 경염(競艶)이 벌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붉으며 눈부시게 화려한 목단은 위엄이 있고 품격이 남달라, 나는 그녀를 중전(中殿)이라 부른다. 꽃송이가 어찌나 크고 무거운지 제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모습이 애잔하기까지 하다. 조선시대의 중전은 대개 왕의 의중과는 무관하게 간택된, 재색을 겸비한 반가(班家)의 규수가 아니던가. 중전은 아마도 색(色) 보다는 재(才)와 예(禮)가 더 뛰어났기 때문인지 붉은 목단 역시 색보다는 그 크기와 화려함이 더 도드라지는 듯하다. 왕과 중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 드문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일까. 그래서 그런지 그 높은 기품과 아름다운 자태에도 불구하고, 이 붉은 색 목단에는 아쉽게도 그윽한 향이 없다.

중전 옆에는 상아색 목단이 눈부시게 활짝 피어있다. 같은 목단이건만 이 상아색 목단은 그야말로 끼와 요염함이 넘쳐흐른다. 꽃술 깊숙이 머금은 빛깔은 황금색과 흰색이 함께 있는 듯 붉은색 목단보다 더 진하고 화려할 뿐 아니라, 가까이 다가서면 이성을 유혹하고도 남을 진한 향기가 코와 함께 마음을 자극한다. 오늘날 많은 여인들이 애호하는 피어니 향수도 이 꽃의 향기에서 비롯되었다. 향이 짙고 꽃이 곱다 보니, 바로 옆에 있는 중전보다 벌과 나비들이 훨씬 자주 모여든다. 나는 이 상아색 목단을 희빈(禧嬪)이라 부른다.


중전과 희빈보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피어난, 분홍색도 아니고 상아색도 아닌 애매한 색깔의 목단이 있다. 나는 이들을 상궁(尙宮)이라 부른다. 향기도, 빛깔도 뚜렷하지 않고, 중전과 희빈을 바라보며 조용히 피어 있는 모습이 어느 날 밤, 상감의 스침 한 번에 마음을 빼앗긴 궁녀 같기도 하다. 졸지에 성은을 입은 여인이라 할까.

5월 하순 초여름 햇살이 따가워질수록 이들 세 여인은 상감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그 색과 향을 다해 한껏 자태를 뽐낸다. 아침 출근길, 나는 가방을 들고 잠시 상감마마가 되어, 이 세 여인의 유혹과 배웅을 마음껏 누려본다. 이는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한국 사내가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봄이 선사한 작은 사치가 아니겠는가? 목단꽃들은 상감마마가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긴 하루해를 자기들끼리 기다려야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꽃도 피면 진다고 하였으니, 이들도 또한 각기 최후를 맞는 때가 온다. 놀랍게도 가장 먼저 최후를 맞는 것은 희빈이다. 그 찬란하던 상아색 꽃잎은 어느새 누렇게 변하고, 한 줄기 바람에도 힘없이 떨어져 금세 사그라지고 만다. 화려함이 지나쳐 그랬는지 땅에 떨어진 누런 꽃잎은 더욱 초라하기만 하다.

며칠 후, 멀리서 왕을 바라보기만 하고 중전과 희빈의 견제에 애만 태우던 상궁 목단들이 그 뒤를 따른다. 은근한 존재였던 이들은 초라한 누런 색으로 변하여 그 시든 꽃잎도 소리 없이 조용히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끝으로 마침내 중전의 차례가 온다. 마지막까지 힘겹게 품격과 위엄을 지키려 애쓰던 큰 꽃머리의 중전은, 땅에 닿을듯 구부러진 가지가 이제 시들어가는 크고 무거운 붉은 꽃송이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다. 희빈과 상궁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중전의 모습은 장엄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이윽고 모든 꽃잎이 다 떨어진 뒤 앙상하게 그 흔적만 남는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 위엄과 화려함을 뽐내더니 그 모습은 다 어디 가고 마치 조선시대 촌부(村婦)의 다 해지고 바랜 치마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제일 마지막까지 남은 그녀의 기개는 알아줄 만하다. 마치 희빈과 상궁들에게 ‘요것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상감을 유혹해도 결국 끝까지 남는 이는 내가 아니드냐’라고 외치는 것처럼.

이렇듯 5월과 6월에 걸쳐 집 앞 화단에 펼쳐진 중궁전 세 여인의 화려한 경염은, 무정한 상감이 책가방을 덜렁덜렁 들고 출근하며 ‘그래 자네들 내년에 또 보세’ 이 말 한마디를 끝으로 조용히 막을 내리며 내년 봄을 기약한다.

<최규용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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