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람맞힌 푸틴, 그래도 가는 젤렌스키…정상 담판 대신 팽팽한 기싸움

2025-05-14 (수) 10: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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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틴, 체급 낮은 대표단 파견… ‘전쟁 이기고 있다’ 판단 속 고자세

▶ 젤렌스키도 앙카라에만 머물 듯… “이스탄불 회담, 쇼에 그칠 것”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3년여 만에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다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됐지만, 첫 만남에서 실질적인 종전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보좌관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이스탄불 협상에 파견하는 명령에 서명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요구해 온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공식화한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바람'을 맞았음에도 같은 날 밤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로 떠났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이 올 경우에만 회담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혀 온 만큼, 그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만 만나고 귀국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스탄불 협상은 양측 대표단이 만나는 실무 회담 성격의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 통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기대에 못 미치는 하급 관리들로 구성된 팀을 파견했다"고 평가하면서 협상 전망도 어두워졌다고 내다봤다.

특히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문화부 장관 출신인 메딘스키를 대표단 단장으로 임명한 것은 협상에서 조금도 양보할 뜻이 없음을 보여준다고 WSJ은 분석했다.

메딘스키는 전쟁 초기인 2022년 이스탄불에서 진행된 협상에서도 러시아 측 대표단 단장을 맡은 인물이다.

그를 다시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이번 협상이 3년 전 결렬된 협상의 '재개'라는 의미를 부각하고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의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당시 작성된 협정문 초안에는 외국의 군사 원조 중단, 우크라이나 군사력의 대폭 감축 및 주권의 제한 등이 담겼다.

당시보다 러시아군이 점령한 영토가 적은 현재, 서방의 지원을 받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그때 거부한 협정문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일방적 주장을 밀어붙이는 러시아의 태도 이면에는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분석했다.

실제로 러시아가 승기를 잡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미국 정부 추산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 16개월 동안 우크라이나 전체 영토의 약 1%만 추가 점령하는 데 그쳤지만, 같은 기간 4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지원이 감소하는 가운데 소모전을 이어간다면 시간은 러시아의 편이 되리라는 것이 푸틴 대통령의 계산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협상에는 응하는 모습을 보이되, 김을 빼면서 시간을 끌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러시아유라시아센터 타티야나 스타노바야 선임연구원은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방어선의 점진적 붕괴를 예상하고 있다며 "심리적 충격을 받은 우크라이나 엘리트들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할 것이라고 푸틴 대통령은 믿고 있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 역시 러시아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불참에도 튀르키예를 찾음으로써 협상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것은 러시아라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전할 것으로 관측된다.

아울러 앙카라에만 머물다가 떠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 이번 만남이 2022년 이스탄불 협상과는 단절된 별개의 협상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WSJ은 해석했다.

회담에서 영토 문제와 전후 안보 보장 방안 등 첨예한 쟁점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주도권을 잡기 위한 힘겨루기만 팽팽하게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WSJ은 "회담을 둘러싸고 이상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근본 원인은 서로의 우선순위가 달라 평화협정이 체결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이라며 "양측이 최종 목표는 양보하지 않은 채 진전을 위한 의지가 있다는 것만 보여주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타노바야 선임연구원은 "실질적으로 휴전이나 평화를 위한 진지한 논의가 이뤄질 상황은 아니다"라며 15일 회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본질적으로는 "쇼"에 불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변수가 있다면 협상의 중재자인 미국의 태도를 꼽을 수 있다.

'취임 후 24시간 내 종전' 공언이 무색하게 4개월 가까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들어 러시아를 향한 경고성 발언도 꺼내 가며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가자지구 휴전 협상, 이란 핵 협상, 중국과의 무역 협상 등 '고위험 외교 과제'가 산적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 휴전 문제를 서둘러 처리하려는 유인이 클 수 있다.

앞서 유럽연합(EU)은 이날 러시아의 편법 원유 수출을 봉쇄하기 위해 '그림자 선단'에 속한 유조선 약 200척을 제재 목록에 올리는 제17차 대(對)러시아 제재에 합의했다. EU는 18차 제재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엑스(X·옛 트위터)에서 "이 전쟁은 끝나야 한다"며 "러시아에 대한 압력을 계속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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