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제도는 약 2천8백 년 전에 화산폭발로 빚어져 탄생한 화산섬들이다. 8개의 큰 섬들을 포함 13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졌다.
1778년 1월 영국탐험가 제임스쿡이 하와이를 발견할 당시는 섬마다 부족추장이 통치하고 있었다.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 수완과 지략이 뛰어난 ‘카메하메하’ 란 청년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가 속했던 하와이(빅아일렌드)추장인 조부로부터 힘입어 제임스쿡에게 영어를 배웠고 영국의 많은 유용한 기슬을 익혔다.
그는 추장으로 승계를 받자 서구의 새로운 무기를 도입하여 먼저 자기출생지인 하와이섬(빅아일렌드)의 패권을 장악한데 이어 다른 섬들을 정복했다.
마지막 오아후섬의 누아누팔리(바람산)에서 벌어진 혈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통일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하와이왕국이 카메하메하1세의 시작으로 마지막왕 ‘릴리우오칼라니’까지 8대를 이어갔다.
1820년 선교사를 중심으로 미국자본가들이 사탕수수재배에 열을 올리면서 왕실에 특권을 요구했다. 이들은 복잡한 왕실권력싸움을 활용해 친미적 왕실을 옹립하는데 지원했다.
마지막 여왕 ‘릴리우오칼라니’는 전임 칼라카우아왕이 미국에 무역특혜권을 주는 법안에 서명할 때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바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즉위하자 워싱턴의 미국정부와 현지인의 미국인들이 공조체제를 형성해 왕을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왕은 바로 미국자본을 제한하는 조치로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그러자 미국무장관은 하와이병합과 왕국전복 등을 내용으로 한 임시정부수립에 관한 실천에 들어갔다.
이어 1893년 미합중국은 쿠데타를 지원하기위해 ‘미해군전함 보스톤호‘와 2개 중대의 해군을 하와이로 투입했다.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보호를 위해 상륙한다는 명분으로 오후 5시경 장교를 포함한 무장해병대 164명이 호놀룰루에 상륙했다. 개틀린 기관총과 야포를 갖춘 미해병은 이올라니궁전에 진입해 궁전을 접수하고 여왕을 유폐시켰다. 다음날인 1893년 1월 17일 임의로 만든 임시정부의 치안위원회를 동원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하와이왕국의 종식을 선포했다. 여왕은 즉시 특사를 미국정부에 보내 임시정부 하와이왕국을 승인하지 않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스티븐스 국무장관은 ‘임시정부를 승인하며 하와이 왕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회답했다.
미국인들이 조직한 임시정부는 그해 말 하와이공화국으로 선포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한편 마지막 국왕‘ 릴리우오칼라니여왕은 석양에 젖은 왕권회복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제위 2년 만에 패망의 슬픔을 안은 채 역사 속에 묻혀야했다.
여왕은 ‘하와이여왕 하와이이야기’ 란 회고록을 썼다. 또한 하와이의 유명한 민요인 ‘알로하 오에’ 란 작곡 작사를 썼다. ‘그리운 사랑’이란 뜻으로 사랑하는 하와이왕국을 서정적으로 그린 노래이다.
하와이왕국의 보석 “이올라니궁전”은 미국의 유일한 왕궁으로 1882년 칼라카우아왕이 피렌체 방식으로 화려하게 건립한 최고 선진화된 건물이다. 7주년 즉위식 행사를 거행했던 성전이기도하다.
군주정을 무너뜨린 하와이기존백인들은 자신들끼리 샌퍼드돌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하와이공화국을 수립하고 1897년 합병조약을 체결한 뒤 하와이를 미국령으로 편입했다. 그 후 1959년 본토와 대등한 정식 주로 편입 되어 미국의 50번째 주로 하와이 주가 되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100년 뒤에야 미국은 하와이멸망에 대해 사과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부활시키거나 원주민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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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훈 수필가ㆍ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