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행 밤 비행기를 탔다. LAX에서 난디(Nadi)까지 열한시간 이상을 좁은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갈일이 걱정이다. 옆자리가 비어있길 바라며 앉아있는데 출발 마지막 순간에 키가 비행기 천장에 거의 닿을듯한 노인 한 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눈이 푹 들어가고 거무잡잡한 주름진 얼굴에 색 바랜 국방색 외투를 입은 남자다. 그의 왼팔이 내 자리까지 침범해서 내 오른팔과 그의 왼팔이 꽉 끼어 서로의 체온을 느낄 정도다. 숨쉬기도 불편하지만 곤하게 자는 노인을 깨워서 불평할 수 없어서 꾹 참았다.
거의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승무원이 나누어준 입국 세관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내게 자기 여권과 세관 보고서 용지를 주며 잘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듯 천연덕스럽게 써 달라고 손짖을 한다. 선한 눈빛으로 부탁하는 그의 통가여권과 비행기표를 받아보고 내눈을 의심했다. 그는 나보다도 젊은 통가(Tonga)사람이다. 언어소통이 안되니 그의 여권을 보며 그가 음식, 과일, 육류 등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 같아 대충 짐작해서 작성했다. 그는 내릴 때까지 연신 손짖으로 고맙다는 표시를 했고 나도 그와 비슷한 손짖으로 괜찮다고 답하며 공항에서 헤어졌다.
이른 새벽인데도 난디(Nadi)공항 밖에 나오자 마자 가벼운 자켓도 벗어야할 정도로 덥고 습하다. 암반석에서 나오는 지하 생수로 유명한 피지의 물을 주욱 한숨에 들이마시니 상쾌하다. 피지인의 주식인 타로(큰 토란 같은것), 구마라(고구마), 빵열매(bread fruit) 등 온갖 채소, 과일, 생선, 고기가 있는 재래시장을 돌아보며 이들의 먹거리와 저변의 살아가는 땀 냄새를 맡아본다. 피지사람과 비슷한 그 통가 남자가 시장 어느곳에서 불쑥 나올것같다.
파란 남 태평양 비취에 온갖 야자수와 파랗게 열린 열매들이 펼쳐있는 리조트 호텔로 들어와 짐을 풀고 비행기에서 지쳤던 몸을 따뜻한 천연수에 씻고 전화기를 열어 뉴스를 보았다. ‘이걸 어쩌나!’통가에 7.0의 지진으로 많은 건물이 파괴되고 인명피해도 났다고 한다. 내 옆에 앉았던 통가 아저씨 얼굴이 눈에 아른거린다. 지금쯤 그 아저씨도 집에 도착했을 텐데 혹시라도 지진이 난 곳에 산다면 어떻하지?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장시간 여행후 집에 들어가 자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그 남자와 통가 사람들이 다 내가 잘아는 이웃같아 신경쓰인다.
우리는 한 평생 살면서, 아니 하루동안에도 뜻 밖의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여러 만남 중에서 때에 따라서는 도움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한다. 호감으로 만났다가 비호감이 되기도하고 비호감으로 만났다가 호감이 되기도한다. 열한 시간이상 내 자리까지 침범해서 나를 불편하게했던 그남자가 왠지 조금도 밉지않다. 오히려 나이에 비해 한참이나 노쇠해보이는 그를 돕고싶고 그의 선한 눈빛에 연민이 간다. 그가 무사했으면 좋겠다.
통가는 이전에는 전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태평양 한 가운데 폴리네시아 지역에 위치한 나라다. 피지와 인접해 있는 인구 십만명이 사는 작은 섬나라, 그곳에 일어난 지진재해가 내 일처럼 걱정된다. 고단해 보였던 기내에서 만난 그 남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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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화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