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케스트라의 첫 여성들

2025-04-02 (수) 12:00:00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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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열린 2025 오스카시상식에서 단편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한 ‘오케스트라의 유일한 여자’(The Only Girl in the Orchestra)는 뉴욕 필하모닉에서 55년간 더블베이스 단원이었던 오린 오브라이언(Orin O’Brien)의 이야기를 담은 필름이다. 오브라이언은 1966년 뉴욕 필에 입단한 최초의 여성으로서 2021년 은퇴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183년 역사의 뉴욕 필은 오랫동안 금녀의 조직이었다. 그러다 레너드 번스타인 시절에 오브라이언을 받아들이면서 그 벽이 허물어졌고, 차차 문턱이 낮아져 마침내 2022년에는 여성 단원의 수가 남성을 넘어섰을 정도로 반세기만에 놀라운 변화를 이뤄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35분 길이의 다큐 ‘오케스트라의 유일한 여자’는 100여명 전원 남자들이 포진한 교향악단에서 자기 키보다 크고 육중한 더블베이스를 연주하는 오브라이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여자 탈의실도 없어서 화장실을 사용해야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선망하던 뉴욕 필에 들어간 것, 영웅처럼 보이던 단원들이 자신을 동료로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고 회상한다. 2년 동안 카네기홀의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그들의 모든 연주를 듣고 모든 단원을 지켜보았기에 입단하자마자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초의 여성’이란 꼬리표 때문에 처음부터 음악계와 언론의 엄청난 관심과 조명을 받았고, 뉴욕 필은 아름다운 그녀를 홍보에 적극 이용하려 했다. 타임지는 “그녀가 연주하는 더블베이스만큼이나 굴곡진 몸매”라고 썼고, 뉴욕타임스는 “어떤 오케스트라도 소유하고 싶을 만큼 예쁜 아가씨”라는 표현으로 그녀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나의 음악적 배경이나 경력, 얼마나 오랜 시간 노력하고 연습했는지 등 연주자로서의 도전과 어려움은 묻어둔 채 오로지 여성이라는 사실만 부각시켰다”고 그녀가 불만을 토로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당시 음악계는 여성 연주자들의 실력은 인정했지만 함께 연주하기는 불편한 존재로 여겼다. 주빈 메타 전 LA필하모닉 음악감독은 “오케스트라에서 여성의 자리는 없다”고 단언했고, 남자단원들도 “여자가 매력적이면 함께 연주하기 어렵고, 그렇지 않으면 함께 연주할 필요가 없다”고 공공연하게 비아냥대던 시절이었다.

오린 오브라이언(89)은 1930년대 할리웃의 스타 부부였던 조지 오브라이언과 마거리트 처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딜 가나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부모를 보고 자라면서 그녀는 그와는 반대의 삶을 택했다. 여성주자가 드문 더블베이스를 선택한 것도 주목받거나 나서는 일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길이 6피트, 보통 남자 한사람의 몸집만큼 큰 더블베이스는 오케스트라의 관현악기를 통틀어 가장 크고 가장 낮은 음을 내며 가장 뒷줄에 서는 현악기여서 상대적으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연주자들보다 주목을 덜 받는 편이다.

그처럼 한 악기 섹션의 일원으로서 좋은 음악의 연주에 헌신할 뿐,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그녀는 다큐를 찍은 것도 조카인 몰리 오브라이언 감독이 수년 동안 끈질기게 부탁해 성사된 것이라며 자신이 ‘레전드’라고 불리는 것조차 애써 부인하고 있다.

클래식 교향악단의 보수성은 유명하다. 특히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의 오케스트라들이 더 심해서 빈 필하모닉은 1997년까지 여성에게 오디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세월이 변하면서 현재 빈 필에는 145명의 단원 중 여성이 24명, 이 가운데 남가주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해나 조씨가 2024년 아시안 여성 최초로 정 단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하고 있다.


1982년에야 처음 여성 연주자를 받아들인 베를린 필에는 현재 26명의 여성단원이 있는데 2023년 역사상 최초로 여성 악장(concertmaster)을 임명해 큰 뉴스가 되었다. 화제의 주인공은 라트비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비네타 사레이카-뵐크너, 하지만 그녀가 18개월 만인 작년 9월 전격사임을 발표해 또 한 번 충격을 던져주었다. 터프하기로 유명한 베를린 필의 텃세를 견디지 못해 떠난 것으로 음악계는 보고 있다.

LA필하모닉의 경우는 어떨까? 놀랍게도 1925년 여성지휘자 에델 레진스카가 처음 LA필과 연주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영국 출신 피아니스트였던 그녀는 바로 다음해 당시로는 상당히 이례적으로 보스턴에서 여성들의 심포니를 조직해 지휘 활동을 이어갔다고 전해진다. 지휘자가 아닌 LA필의 첫 여성단원은 1961년 입단한 클라리넷 주자 미셸 주코프스키로, 2015년 은퇴할 때까지 54년 동안 연주했다. 현재 LA필 멤버들은 106명 가운데 35명이 여성이다.

한편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는 성 평등에 있어서 미국과 유럽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다. 서울 시립교향악단의 경우 105명 중 65명이 여성이며, 부천 필하모닉은 전체 74명 중에 63명, 여성이 무려 85%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음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별이 아니라 실력이다. 이 엄연한 사실이 모든 교향악단에 적용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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