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필리핀 대통령은 누구일까.
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이자 현 17대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의 부친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아닐까.
20년 간 필리핀을 철권통치하면서 독재자로 악명을 떨쳤다. 그 기간 대부분이 한국의 군사정권시절과 겹친다. 그는 결국 ‘피플 파워’에 떠밀려 하와이로 망명한다.
그게 1986년 2월의 일로, 그 다음 해인 1987년 한국에서는 유월항쟁(六月抗爭)과 함께 20여년 군사정권시대가 막을 내린다.
거의 같은 시기에 유사한 정치적 터널을 통과했다고 할까. 그 경험 때문에 마르코스는 한국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16대 필리핀 대통령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 역시 마르코스 못지않게 유명세를 탈 것으로 보인다.
‘싸우는 독재자’로 자처했었다. 스스로를 히틀러와 비교, 300만 마약사범을 모두 죽이겠다는 끔직한 말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는 공공연히 ‘개자식’이란 욕을 퍼부어대기도 했다. 현직 시절 남긴 어록으로 그 때 이미 국제적으로 꾀나 악명을 떨쳤었다.
그 두테르테가 또 다시 이름값을 하고 있다. 재임(2016년 6월~2022년 6월) 중 벌인 ‘마약과의 전쟁’에서 수 만 명을 학살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돼 국제형사재판소(ICC)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것.
변명의 여지가 없는 독재자다. 그리고 대학살의 장본인이다. 그 두테르테가 마침내 정의의 법정에 세워졌다. 모처럼의 밝은 뉴스다.
밝음(明)에는 항상 어두움(暗)이 따른다고 하던가, 뒤로 들려오는 소리가 상당히 컴컴하다.
올리가키, 즉 과두 지배집단들에 의해 장악된 사회다. 권력은 주요 엘리트 가문 간의 경쟁과 연합을 통해 창출돼왔다. 이런 풍토에서 치러진 게 2022년 필리핀 대선으로 마르코스 가문과 두테르테 가문의 연합은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와 사라 두테르테. 두 전직 대통령의 아들과 딸이 나란히 대통령과 부통령 자리를 차지 한 것이다.
정치적 동맹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가 출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여러 정책에서 갈등이 빚어진 것. 특히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인 것은 외교노선을 둘러싸고서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남중국해 영유권문제로 중국과 각을 세우며 미국에 추가로 4곳의 군사 기지를 제공했다. 그러자 두테르테가 비난의 포문을 열고 나섰다. 중국관영 글로벌 타임스와 인터뷰를 통해 마르코스를 미국의 애완견 식으로 비난한 것.
마르코스의 친미, 두테르테의 친중 성향이 정면으로 부딪혔다고 할까. 이후 상대의 비리를 서로 폭로하는 등 갈등은 전방위로 확산됐다. 결정적 순간은 지난해 11월 23일에 찾아왔다.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이 자신에 대한 암살계획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면서 자신이 암살되면 대통령 가족을 죽이라고 경호원에게 지시했다는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결국 전직 대통령 체포로까지 이어진 두 과두지배집단간의 암투. 이는 루손 섬을 중심으로 한 북부와 민다나오 섬 중심의 남부, 두 지역 간의 내전을 불러오고 더 나가 그 불똥은 전 아세안(Asean)지역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상황을 더 어렵게 하고 있는 필리핀이 지정학적 시한폭탄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시아타임스의 지적이다. 다른 말이 아니다. 제 1도련선의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고 있다. 그 필리핀의 국내 정치세력들이 선명한 친미와 친중 양대 세력으로 갈라서면서 미중경쟁의 주요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다는 거다.
상황을 요약 정리하면 이렇다. ‘미국과 중국은 무한대결 상황에 돌입했다. 그 최전선은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을 포용하고 있는 인도태평양지역이다. 이 전선의 최대요충, 필리핀에서 친중 선봉에 서 온 전직 대통령이 공항에서 전격 체포돼 국제형사재판소 법정에 서게 됐다.’
관련해 불현 듯 한 가지 질문이 떠올려진다. ‘이게 단순한 국내 파벌싸움만의 결과 일까. 아니면 그 배후는 혹시…’하는. 그리고 동시에 뭔가 한 모습이 겹쳐지는 느낌이다.
지극한 모화(慕華)에, 종북(從北)의 마음가짐과 함께 오직 시진핑과 김정은의 심기에만 각별한 관심을 쏟아왔다. 그래서인지 귀순의사를 밝힌 북한어선 선원들을 사지인 북한으로 추방하는 과공의 예를 마다하지 않았다. 살인 등의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뿐만이 아니다. 주한미군의 사드배치관련 정보를 중국에 넘겼다. 거기에다가 틈만 나면 중국에 ‘사대의 예’를 다하라고 종용한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 문재인의 모습이다. 그 뒤로 또 다른 인영(人影)이 어른거린다. 김정은에게 수백만 달러의 현찰을 바쳤다. 그리고는 ‘셰셰’를 연발하며 싱하이밍 대인에게도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이재명이다.
2025년 3월 필리핀에서 일어난 두테르테 체포. 이는 내란몰이 광풍이 멎은 후 어느 날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상황에 대한 일종의 예시(豫示)가 아닐까. ‘피플 파워’의 대파노라마가 필리핀에서 전개된 지 1년여 만에 유월항쟁의 역사가 대한민국에서 펼쳐진데서 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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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세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