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세 개의 피아노 연주회를 찾았다. 조성진, 임윤찬, 그리고 장성. 이들의 연주를 연이어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렘이 컸다. 세 사람 모두 세계 정상급 한국인 남성 피아니스트로, 수많은 국내외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한국의예원학교 동문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성장 과정에서 닮은 점이 많았지만, 음악적 개성만큼은 완전히 달랐다.
이중 가장 젊은 피아니스트는 임윤찬이다. 2004년생인 그는 일곱 살이 되어서야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예원과 한예종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 와 공부하고 있고, 다들 아는 대로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혜성과 같이 떠올랐다. 이번 남가주 무대는 오렌지카운티를 대표하는 ‘헨리&르네시거스트롬’콘서트홀에서였다. 런던 심포니와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협연. 개인적으로 그의 연주를 처음 접하는 무대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점에서 더욱 기대가 컸다.
이 곡은 화려한 테크닉과 깊은 서정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다. 그의 뛰어난 테크닉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그가 이 곡이 지닌 극적인 감정선과 서정미를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는데, 임윤찬은 폭발적인 에너지와 강렬한 몰입도로 무대를 장악했다. 거침없는 표현력으로 음악의 극적인 순간을 완벽하게 살려냈다.
1994년생인 조성진은 다섯 살에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연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원과 서울예고 시절에도 ‘질리지 않을 만큼’만 치며 즐겼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경지다. 이번 라벨 탄생 150주년 기념 연주회로 독주회와 협연이 있었고, 필자는 LA 필하모닉과의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협연을 보러갔다. 특히 라벨 해석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온 조성진이기에 더욱 기대가 컸다.
그는 늘 절제된 우아함이 돋보이는 연주자이다. 특히 라벨과 드뷔시를 연주할 때면 늘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떠올리게 했다. 이번 협연을 보면서도 다시 한번 백건우가 연상되었는데, 음악을 섬세하세 해석하는 접근 방식이 닮았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 유학의 영향인지, 혹은 프랑스 음악이 좋아서 프랑스로 향했던 것인지,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두 연주자 모두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에서 남다른 강점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번 무대도 예외없이 훌륭했다. 특히 이전보다 더욱 감성적 여유가 더해져서 청중과의 교감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이제 조성진은 ‘피아노를 잘 치는 연주자’가 아니라, 청중과 함께 즐기는 ‘예술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1986년생으로 셋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장성은 4살에 일본에서 데뷔해, 평생을 피아노와 함께해온 연주자다. 그러나 그는 연주자에 머무르지 않고, 지휘자이자 예술 감독으로서 음악가로서의 경계를 확장해가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 무대에서 선택한 작품은 오랜 음악적 탐구와 경험이 응축된, 바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이었다.
한국 예술의 전당 공연에 앞서 남가주에서 선보인 이번 공연에서 그는 쇼팽과 리스트의 연습곡을 비교하며 곡 해석을 이야기했고, 즉석에서 쇼팽의 몇 소절을 연주했을 뿐인데도 이미 감동이 밀려왔다. 초절기교는 리스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곡으로, 손가락의 속도와 독립성, 폭발적인 다이내믹, 강렬한 표현력을 모두 요구한다. 그만큼 한 번의 리사이틀에서 12곡을 연속으로 연주하는 것은 체력과 기술의 극한에 도전하는 일이어서 흔하지 않다.
게다가 이 곡은 단순한 기교의 과시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초절기교는 시적이고 극적인 스토리텔링이 살아 있는 작품으로 연주자의 해석 능력까지 요구한다. 슈만조차도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열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했을 정도다.
장성의 연주는 기술적 완성도를 뛰어넘어 예술이었다. 리스트가 던지는 온갖 난관을 뚫고 나아가며,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패시지 속에서도 선율의 흐름을 섬세하게 살려냈다. 그의 피아노는 마치 하나의 악기가 아닌, 거대한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하고 화려했다. 강렬한 몰입과 감성이 하나 되어, 어느새 숨 막히는 그의 여정에 빠져들었고, 연주가 끝난 후에서야 비로소 숨을 내쉴 수 있었다.완벽함을 넘어선, 장성만의 초절기교였다.
나는 20살, 30살, 그리고 38살의 세 피아니스트가 각기 다른 색채로 펼쳐낸 무대를 보며, 마치 한 예술가의 성장 과정을 시대별로 지켜보는 듯했다. 그들의 연주는 이미 완벽했다. 그러나 예술에서 완벽이란 도달점이 아니라, 끊임없는 탐구와 도전의 과정이다. 그들은 음악 속에서 더 깊은 진실을 찾으며, 연주를 통해 예술의 본질을 증명해 나간다.
‘음악과 나’에서 ‘나의 음악과 너’로,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음악’으로 연주자는 작곡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자신의 해석을 담아 청중에게 전한다. 그리고 청중이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 울림이 서로에게 가 닿는 순간, 음악은 비로소 완성되고 감동은 더욱 깊어진다.
그렇게 지난 2월, 그들의 음악이 들려준 이야기는 여전히 가슴 깊이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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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아 문화 칼럼니스트 YASMA7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