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 있을 때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최초의 말과 함께 그는 다시 태어난다. 오랜 침묵 뒤에 다시 말하기 시작한 사람을 잘 살펴보면 그는 마치 말에 의해서 이제 막 눈앞에 출생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로 확인되는 것이다. 침묵은 말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침묵이 없이는 말이 존재할 수 없다. 말에게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침묵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인간이 되게 해주었던 말을 단념하고 새롭게 시작한다.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할 말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존 샌포드의 ‘홀로 있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중에서)
침묵은 도피이거나 수동적 삶의 행위가 아니다. 침묵은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태어나도록 내면을 개방하고 비우는 능동태다. 침묵은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용수철처럼 잠시 웅크리는 준비의 시간이다. 침묵 없는 영혼은 불안하다. 인생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깊은 숲속의 호랑이처럼 ‘솔리튜드(solitude)의 영력(靈力)’을 키우라.
침묵 속에서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을 만들었던 옛 언어를 무너트린다. 침묵 안에서 인간은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고 다시 태어난다. 광야로 나간 예수는 침묵과 금식으로 자신을 무너트리신 후 새로운 신적 언어로 사단을 제압하고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었다.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침묵으로 자신의 육신을 무너트렸다. 부활하신 후 온 인류에게 자신이 구원자이심을 증명했다. 예수의 침묵 속에는 언제나 부활의 성스러움이 숨어있다.
모세는 외향성, 사교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40년 동안 모세의 침묵의 삶은 몸에 배어 있었다. 시내산과 미디안 광야는 모세가 애용하던 침묵과 묵상기도의 훈련장이었다. 하나님과 독대하고 내려올 때 마다 신적 광채가 모세의 얼굴을 비취고 옹위했다. 모세의 카리스마 리더십은 침묵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다.
비범한 인간은 침묵 속에서 자기파괴를 경험한다.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자기파괴와 부활사이의 경계에서 초월자로 우뚝 선다. 파스칼(Pascal)은 오랜 침묵의 시간을 가진 후에야 단편 메모리알(Memorial)을 얻었다.
침묵의 시간동안 파스칼은 지금까지 자신이 되게 만들었던 옛 사상과 언어를 단념하고 파괴했다.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할 새 사상과 새 말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파스칼은 침묵을 사랑하고 그 속에 머물렀다.
파스칼의 제자들은 이 단편 메모리알에 [팡세, Pensees]라는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내 놓았다. 세상을 이 글을 읽고 놀랐고 경악(驚愕)했다. 옛 파스칼은 죽고 새 파스칼이 태어난 것이다. 그는 죽은 지 오래 되었으나 지금도 살아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파스칼을 다시 태어나게 했던 그 침묵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24시간 활기차고 열정적 삶을 살라’고 세상은 우리를 부추긴다. 세상은 ‘혼자 있는 능력(capacity to be alone)’을 폄하하고, 고요한 묵상과 사색의 침묵 과정을 경시한다. 누가 내향성, 고독, 수줍음의 기질을 가졌다면 가차 없이 정신질환자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정신장애 홍보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현대인은 홀로 침묵의 시간 속에 머물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장엄하고 신비한 자기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다. 홀로 침묵의 시간을 갖는 데는 자기 파괴의 용기와 정직이 필요하다. 당신은 리더인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가끔은 구르지 않고 한 곳에 머무는 이끼 낀 침묵의 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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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