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포르타 산타’, 성스러운 문

2025-02-19 (수) 07:30:53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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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결혼기념 여행으로 이태리 로마에 다녀왔다. 목적지를 로마로 정한 것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아내가 카톨릭 교회의 모체이자 중심교회인 성 베드로 성당을 순례하고싶어서였다.

2월초 로마의 날씨는 뉴욕의 3월처럼 온화했다.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FCO)은 한국의 인천공항처럼 깨끗하고 넓었으며 입국수속도 신속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교통편은 공항 청사에서 바로 연결되는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공항 급행열차가 가장 빠르고 경제적이었다. 오전 9시경 로마 시내에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에 짐을 풀고 지하철을 타고 바티칸으로 갔다. '메트로'라 부르는 로마의 지하철은 서울 지하철처럼 깨끗하고 소음과 진동도 적었다.


로마시내 북서부에 자리잡은 바티칸은 여의도 1/6 면적에 인구 천여명밖에 되지않는 초소형 국가이지만 주권과 영토와 국민을 갖춘 어엿한 독립국이다. 올해는 25년마다 돌아오는 바티칸의 희년(Jubilee)으로 성베드로성당 정면 우측에 있는 성스러운 문(Porta Santa)이 열리고 이 문을 통과하면 특별한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순례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성베드로 성당은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사람인 베드로 성인의 무덤 위에 자리잡은 거대한 건축물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이 성당은 1506년에 건축을 시작하여120년만에 완공되었으며 장엄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있어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다.

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하고 나와 성베드로 광장을 둘러보았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광장 중앙에는 이집트에서 옮겨온 25m 높이의 오벨리스크 첨탑이 우뚝 서 있고 두개의 분수대가 있었다. 광장 양옆으로 도열한 288개의 대리석 기둥이 양팔을 벌린 듯 반원형의 회랑을 이루고있고 각각의 대리석 기둥 위에는 성인들의 조각상이 올라 서 있었다.

둘쨋날은 성베드로 사원 바로 옆에 있는 바티칸 뮤지엄을 방문하였다. 세계최대의 미술관인 바티칸 뮤지엄은 고대 이집트의 유물로부터 르네상스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만점의 조각과 미술품들을 소장하고있다.

어찌나 규모가 큰지 끝없이 이어지는 전시실을 주마간산격으로 돌아보는 데만도 3시간이 걸렸다. 사진으로만 보던 미켈란젤로의 천정화 '아담의 창조'와 조각상 '피에타'도 그곳에서 직접 관람할 수 있었다.

바티칸을 나와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을 둘러보고 트레비 분수로 가기위해 지하철역으로 갔다. 일가족으로 보이는 4명의 남녀가 다가오더니 엘레베이터를 타면 바로 환승역까지 간다면서 우리를 엘레베이터 안으로 안내했다.

좁은 엘레베이터 안에 그들 네명과 우리 부부 둘 모두 여섯사람이 탔다. 그들 중 한 여자는 아내에게 자꾸 말을 걸었고 다른 여자는 검은 쟈켓을 오른 팔에 걸치고 내 옆에 붙어서 있었다.


여자들 뒤에는 젊은 남자 둘이 서 있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 나는 지갑이 들어있는 잠바 윗주머니를 살펴보았다. 지퍼가 열려있고 지갑이 없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상의로 가린 손으로 잠바 주머니 지퍼를 내리고 지갑을 꺼내간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크게 소리치며 여자의 팔을 세게 붙잡고 몸을 샅샅이 뒤졌다.무언가 쿵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로 내 지갑이었다. 신분증과 크레딧카드. 여행경비 등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있었는데 만약 지갑을 되찾지 못했다면 얼마나 큰낭패인가.

앞으로 3일간 예정된 나폴리와 폼페이 유적지, 소렌토 등 남은 일정을 소화 못하는 것은 물론 맛있는 이태리 피자와 이태리 왕만두도 못먹고 모처럼 나온 여행을 완전히 망쳐버릴 뻔 했다.

소매치기당한 지갑을 되찾은 것도 천만다행이지만 그 악당들한테 면도칼 테러를 당하지 않은 것도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희년에 성스러운 문을 통과해서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셨나보다.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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