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과 내일] 세도무상(勢度無常)

2025-02-18 (화) 07:50:56 오해영/뉴욕평통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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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혹독한 정치의 해악은 호랑이에게 잡혀먹히는 고통보다 더 크고 무섭다고 했다. 난 90 평생 한국 세도(勢度)가들의 어짐과 겸허함과 대도(大道)의 극치를 보지 못했다. ‘막스 베버’는 정치는 권력이라는 악마의 수단으로 천사의 대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단과 목적의 극단적 괴리로 실패한 지도자가 되어 오류를 범한다.

불교에서 무상(無常)은 덧없다는 뜻이다. 우리들은 감상적(感傷的)인 기분으로 그렇게 말할때가 있다. 인생은 하염없이 자나가고 죽음으로 한발짝씩 다가간다거나 할때 무상을 얘기한다. 그러나 불교에선 그보다는 훨신 깊은 의미로 새기고 있다.

산스크리스트어로 무상은 “아니트야”라고 한다. “니트야”는 영원히, 불변하는, 항상, 영구한 등을 의미하는 형용사다. 여기서 “아”를 붙여 부정(否定)한는 의미를 갖게했다. 영원하지도 않고 불변하지도 않으며 항구적이지도 않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젊음을 누리면서 그 혈기왕성함은 영원히 시들것 같지 않은 느낌을 갖는다. 적어도 젊은 동안은 그런 생각을 하게된다. 이 세상에 늙지 않고 영원히 젊은 사람은 없다. 이것은 너무도 평범한 진리다. 하지만 순간순간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없는것 같다.

권세를 잡은 사람은 세상 일이 모두 권세를 잡은 그 상태로 오래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설마 그런 바보는 없겠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그런 바보가 된다.

불교가 교훈(敎訓)하는 무상의 사상은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권력으로 충만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이 권력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권력 그 자체로 악하다는 편견과 선입견을 없애야 한다.

우리는 권력의 속성을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권력을 완전히 뒤집으면 새로운 생성과 창조의 동기가 되는것을 우리는 지겹게 봤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한다면 권력을 가져야 가능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만 권력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내면적 삶 역시 권력의 무대다. 권력은 생명의 근본적인 현상일 뿐이며 우리는 그것을 악용하는데 문제가 있다.

특히 정치권의 실체가 불분명한 괴물 같은 권력의 뒤 꽁무니만 정신 없이 쫓다보면 어느새 괴물을 닮아가는 우를 범하기 쉽다. 눈 닫고 귀 막은 채 질주하면서 무고하게 짓밟히는 이들의 한숨과 비명을 외면한다면 집요하게 사실을 캐고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 역시 빛이 바랄 수 밖에 없다.

편견된 권력은 그래서 경계해야하는 민중이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권의 생태를 조명해보면 유난히 진보그릅의 정치 욕망이 강하게 독성 주의다.
보수 그룹들은 두루뭉실한 틀 가장자리에 슬그머니 밀어넣고 어정쩡한 대처로 힘이 없다. 소위 여당이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대통령의 부당한 구속도 목청 한번 내지못하고 해법없는 갈등만 증폭시키고 있다.

철장석심(鐵腸石心)은 굳센의지나 지조를 가리킨다. 소위 조직의 리더라고 자처했던 인물들이 조변석개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며 작금의 시국에서 조선왕조 세조 수양대군때 만고의 충신 성삼문과 낙락장송이 떠오른다. 비록 죄인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언정 끝까지 지켰던 지조와 절개는 작금의 대혼돈의 시대에 이합집산을 넘어 한낱 금수만도 못한 위정자들이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덕목이 아닐런지⋯.

과연 어디다 울분을 토해내야 할지 개탄스럽기만하다. 세상천지 부끄러운 망국의시대 성삼문의 지조와 절개를 닮은 군 및 정치 지도자가 하염없이 그리운 현 시절이다. 성삼문의 형장으로 가면서 읊은 한수의 시다. “북소리 둥둥 이 목숨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네 저승으로 가는 길엔 주막도 없다네 이밤은 어느 집에서 쉬어 갈 수 있으리오” 헌재에서의 대통령의 모습은 단장(斷腸)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왜 이리 가슴이 얘려 오는가.

<오해영/뉴욕평통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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