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세상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윷 말판이 있다. 나뭇등걸이 재탄생된 사위의 수제품이니 작가(?)소개를 좀 해야겠다. 사위는 대학 때 미국으로 유학 온 프랑스인이다.
사위를 보면 프랑스도 한국처럼 외세의 침략과 핍박, 전쟁을 겪은 역사 탓인지 정체성에서 동질감이 느껴지곤 한다. 우리의 유교적 보수성마냥 문화적 보수성이 잠재해서 아닐까. 소소한 풍습의 다름도 존중하며 따르고, 모든 걸 귀히 여겨 아낄 줄 알고, 소박검약하다.
성정까지 겸손하고 유순해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또 한국음식애호가로 딸애가 출장 중이면 우리 집에 오거나 혼자 한국식당에 가는 정도다. 제일 선호음식이 김치찌개와 고등어구이다. 프랑스인답게 요리를 잘하면서도, 부족한 내 솜씨의 한식도 “맛있어요!”하며 엄지척이다. 또 넷플릭스로 보는 한국드라마 열혈 팬이기도 해서 사위의 한국사랑이 고맙고 기특하다.
어느 해 연말, 사위와 친손자에게 전통적인 윷놀이를 소개 차 같이 했다. 이민생활 전, 새해면 세배행사 후, 할머니, 부모님, 형제들, 손주들 4대가 모여 윷을 놀았다. 1대, 2대분들은 오래전 다 떠나셨지만, 화기애애하던 그 따스한 추억이 그리워서였다. 또 내 딸과 아들은 윷놀이를 기억하지만 사위와 손자는 모르니까.
그래서 고이 간직했던 윷을 꺼낸 다음 달력뒷장에다 말판을 그리고 말은 단추로 대용했다. 그런데 처음 접한 사위와 손자의 호응도가 기대이상이다. 윷놀이 묘미의 감초격인 하나에만 표시된 윷으로 도가 나오면 Back 도(예전엔 빠꾸도라 했다)라고 뒤로만 가는 숙명인 룰이 있다.
말을 서너 개씩 포개 신나게 전진하다 몽땅 자살꼴로 역전시키기도 하는 변수다. 그럴 경우 10살짜리 손자가 속상해서 오리입이 되면 우린 모른 척 슬쩍 져주곤 했다. 그렇듯 민속놀이 중 하나인 윷놀이는 남녀노소 배우기 쉽고 속임수불가인 투명한 게임이다. 윷을 던질 때 운도 따르지만, 승패는 말 놓는 기지와 결단력이 요구되는 두뇌 전에 달렸다.
몇 달 후, 내 생일이라 딸네 집에 모였을 때다. 사위가 선물이라며 들고 나온 물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예쁘게 리본을 장착한 통나무 밑둥에 다리가 네 개 달린 둥그런 바둑판형의 윷 말판이 아닌가.
얼마나 사포로 문질렀는지 유리처럼 반질반질하고 천연의 나뭇결이 생생히 살아있다. 말 놓는 자리마다 똥그란 홈까지 파여 가히 예술적 나무 조각품이다. 그제야 딸애가 해설하길 사위가 몇 달 동안이나 통나무를 깍고 다듬고 문지르고 칠한 거란다.
윷놀이가 이방인 사위에게 몹시 인상적이었다는 증거품의 숨겨진 스토리다. 나 역시 사위의 사려 깊음은, 눈만 쌓이면 득달같이 와서 제설작업해줄 때 알았지만, 온갖 정성이 깃든 말판을 보니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나 역시 윷 게임 놀 적에 사위와 손자의 ‘찐반응’을 보며, 새삼 윷놀이의 진가를 재인식하게 됐다. 윷놀이야말로 K-게임에서 세계적인 놀이로 숭상(崇尙)될 공산이 크다는 것을. 해서 모쪼록 온 지구인들이 윷놀이에 심취, 스트레스해소와 서로간의 화합과 협력의 정신을 선양(宣揚)했으면 좋으련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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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