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중장년은 사오육십대를 통틀어 일컫는다. 논어의 ‘위정((爲政)편‘에 보면, 공자는 나이 사십에 세상일에 미혹되지 아니하여 흔들리지 않았고(不惑), 오십세에는 천명을 알았으며(知天命), 나이 육십에 이르러서는 귀가 순해져(耳順) 남의 말을 잘 받아들였다 한다.
이렇게 된다면 가히 성인이라 할만하다. 공자가 성인의 반열에 오른 것도 이 때문이리라. 그러나 어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이 경지에 오를 수 있겠는가?
돌이켜 보면 사십대는 가장 유혹에 약했던 때인 것 같다.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가장 충만했고 에너지도 넘쳤다.
인생의 변환점이 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더 늦어지면 필히 후회할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과감하게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회복하기 어려운 실패를 경험하는 이도 있다.
어차피 그것들의 총합이 인생이긴 하지만, 다들 유혹의 물결이 넘실대는 사십대의 강에 휩쓸려 떠내려 간다. 그래서 사십대는 불혹(不惑)이 완성되는 때라기 보다는 각종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돌다리를 두들기며 발을 잘 떼어 놓아야 하는 새로운 출발점인지도 모르겠다.
오십에 접어 들어서는 그동안 격랑의 세월을 보내면서 자리잡은 삶의 방향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잘 마무리 하여 노후도 준비해야 하는 지천명(知天命)의 중요한 시기임에도 제2의 사춘기인 ‘사추기 또는 갱년기’를 앓는 때이다.
호르몬의 변화, 체력의 저하, 건강에 대한 걱정, 가정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외로움 등으로 자칫 방황의 시간을 보낸다. 이 시기를 잘 넘겨야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회의감과 반항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했다면, 반평생을 살아온 오십대는 독서와 묵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정을 재확인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천명을 알고 알아야 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어린 시절 봤던 책을 다시 읽어 보라.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와 닿을 것이다.
이미 고민했던 삶과 죽음,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도 보다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받아 들이게 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항목도 훨씬 구체적으로 정리가 된다.
그럼 육십대는 어떠한가? 모름지기 은퇴를 저울질 할 나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아가 경제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대충 그림이 완성되어지는 단계이다. 다시 밑그림을 그리거나 색깔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성격도 마찬가지이다. 마음 저 깊이에서부터 오랜 세월동안 굳어질대로 굳어져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일 만큼 소프트해지길 기대하기 어렵다. 귀가 순해지기는 커녕 남의 말에 귀를 막고 살기 쉬운 나이가 육십대이다. 대신 말이 많아져 나도 모르게 먼저 나서 사사건건 간섭하고 훈계를 늘어놓기 일쑤이다.
이순(耳順)의 바람직한 모습은 우선 잘 경청하는 자세에서 나온다. 그것이 첫 출발점이다. 그리고 대화를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현명한 질문과 선한 답을 주고 받으려는 느긋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완성하고 이루었다는 성취감 보다는 항상 새로운 시작이고 새로운 출발점에 다시 선다는 마음가짐이 좋은 것이 아닐까? 오늘 아침에도 우리 ‘그래, 다시 시작이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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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김/전 재미부동산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