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의 기록적인 급등이 지난 12월 연말 한국과 미국 모두 주요 뉴스로 부상했다. 역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급격한 환율 상승폭으로만 보면 한국이 제2의 IMF 외환위기를 겪고 있나 착각할 정도이다.
2024년 마지막 거래일인 지난달 30일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일 종가 1,467.50원 대비 4.80원 상승한 1,472.30원에 마감했다. 장 마감 후에는 1,475.00원까지 올랐다. 이같은 원·달러 환율은 한국이 IMF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7년 이후 2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24년 연말 종가는 1년 전(2023년 12월 28일)의 1,288.0원보다 184.3원이나 뛰었다. 이 역시 1997년 말 1,695.0원 이후 2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환율 연말 종가는 1998년엔 1,204.0원으로 급락했고 2006년엔 929.8원, 2007년 936.1원까지 내려갔다. 그러다가 이듬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며 2008년 말엔 1,259.5원으로 급등했고 이후엔 1,000∼1,200원대를 오갔다. 올해는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과 한국의 비상계엄·탄핵 충격에 따른 정치 불안에 1,500원선 근처까지 수직 상승했다.
이날 한국 증시의 양대 지수인 코스피는 전장보다 5.28포인트(0.22%) 내린 2,399.49에 장을 마치며 2,400선을 내줬다. 코스닥지수는 전장보다 12.22포인트(1.83%) 오른 678.19에 장을 마치는 등 한국 증시도 덩달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킹 달러’는 전 세계 주요 통화와 대비해서도 초강세를 보이고 있다.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반영하는 달러인덱스(DXY)는 지난달 30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108선을 다시 넘어선 뒤 108.3 부근까지 상승하며 9년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RB·연준)의 매파적(통화긴축 선호) 입장 전환 속에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달러를 지지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 달러 강세는 수그러질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 통화들도 달러 대비 하락세를 보였지만 원화만큼 하락하지는 않았다. 달러 대비 원화 하락은 전 세계 통화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킹 달러로 인해 미주 한인사회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킹 달러는 원화를 달러로 환전해 미국에서 거주하는 유학생이나 주재원들에게는 심각한 재정적 타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송금하는 부담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에서 LA로 여행을 오는 관광객의 수요에도 악재가 될 수 있다.
주재원으로 근무하며 한국 원화로 급여를 받는 경우 원화 약세로 가만히 앉아서 매달 수백 달러의 월급이 감봉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같은 상황은 유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유학생들도 원·달러 환율로 인해 미국서 받는 생활비가 급감하면서 소비를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으며 돈을 송금해야 하는 한국 부모 입장에서도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반면 한국 등 해외를 방문하는 미주 한인 등 미국 여행자들은 킹 달러의 대표적인 수혜자들이다. 실제로 최근 한국을 여행하는 미주 한인들은 강한 달러로 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효과를 톡톡히 체감하고 있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도 급격한 환율 변동성은 수익성에 엄청난 타격이다. 원·달러 환율 1,300원~1,400원 안팎을 기준으로 새해 사업 계획을 구상해온 기업들은 환율 상승을 고려해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달러로 결제하는 수출 비중이 큰 기업에는 원·달러 상승이 단기적으로 유리할 수도 있으나, 강한 달러가 수출과 기업 실적에 호재라는 공식은 깨진 지 오래다. 전문가들은 환율이 주요 심리적 저항선인 1,500원을 돌파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한 국가의 국력과 경제력을 따질 때 국민총생산(GDP) 등이 많이 언급되지만 사실 통화가 그 나라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통화 가치는 국가의 경제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수출주도형 경제구조인 상황에서 트럼프 재집권 등으로 수출 전망도 부진하고 현재의 정치 상황이 급격한 원화 약세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원유수출국으로 한 때 부유한 국가였던 베네수엘라는 초인플레이션과 통화 하락 등이 겹치면서 인플레이션 율이 2016년 254.95%, 2017년 438.12%, 2018년 6만5,374.08%로 치솟았다. 이는 2017년 10달러였던 치킨 한 마리가 1년 사이에 6,500달러가 됐다는 의미다. 국민들이 계란 12개를 사기위해 자국 통화를 여행 가방에 수북이 넣어 지불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자국의 통화가 거덜 날 때 국민들이 격어야 하는 고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이 경제규모에서는 세계 12위, 13위 경제 대국이지만 통화가치 측면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경제 학자들과 환율 전문가들은 원·달러 환율이 안정되려면 무엇보다 현재의 정치적 불안감이 시급히 해소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한국이 하루속히 계엄령 선포와 대통령 탄핵 사태가 유발한 정치 부재 상황을 마무리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
조환동 편집기획국장·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