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칼럼] ‘생존법칙’
2024-12-30 (월) 07:16:55
김창만 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나는 그날 밤 부자였다. 수용소 안에서 배급되는 검은 빵이 아니라 독일군 장교들의 식탁 위에서나 볼 수 있는 흰 빵을 한 덩이 통째로 갖고 있는 오만한 부자였다. 나는 이걸 야간 작업반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게 즐거웠다. 특히 급식이 모자라서 도저히 굶주림을 이기기 어려웠을 때, 종종 자기 몫의 빵과 수프를 나에게 주곤 했던 내 친구 벤지에게 조금 큰 빵 조각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 특별히 기쁜 일이었다. (테렌스테 프레의 ‘The Survivior'중에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에서 소유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묻는다. “남의 옷을 빼앗는 자는 도둑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그럴 능력이 있는데도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지 않는 사람을 도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겠는가.”
영락교회를 창립한 한경직 목사는 환대의 삶으로 유명했다. 자신은 사철 양복 한 벌만 입으면서 선물로 들어 온 양복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환대의 습관을 묵묵히 실천했다. 환대의 행위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친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환대를 통하여 공동체는 하나가 된다. 가난한 피난민이 모여 시작한 영락교회가 고난 중에도 생존하며 부흥한 이유는 상호환대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인생을 홀로 살지 말라. 밥 한 끼를 먹더라도 혼자서 먹지 말고 환대와 사귐을 이루는 밥을 먹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생이 살아가는 무대는 참 넓고도 좁다. 돌고 돌다가 또 우연한 만남을 통해 세렌디피티(serendipity)의 기적이 일어난다.
구약 성서 룻기에 나타난 세렌디피티의 기적은 보아스의 따뜻한 환대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는 일상의 평범한 이삭줍기의 환대를 통해 현숙한 여성 룻을 만났다. 보아스는 작은 환대의 행위를 통해 연약한 이방 여인 룻을 끌어안았고 룻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도록 이끌었다. 어디서 이삭을 주었느냐보다 누구와 이 일을 했느냐가 생존에 더 중요하다.
늑대는 최고 포식자다. 먹이를 사냥할 때 타협이나 관용의 틈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을 향해서는 늑대는 한없이 따듯하고 사랑스럽다. 이런 늑대를 길들여 동맹을 맺은 호모 사피엔스(Sapiens)의 가축화의 지혜는 놀랍다.
늑대무리의 탁월한 사회성과 협력은 떼를 지어 함께 부르는 울부짖음에서 시작된다. 호숫가 언덕에서 우수(憂愁)에 가득 찬 늑대 한 마리의 낮은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계곡으로 흩어진다. 곧이어 건너편 숲속에서 응답하는 울부짖음이 조금 높은 톤으로 울려나온다. 이어 근처의 골짜기에 있는 모든 늑대가 제각기 다른 톤으로 울부짖는다. 적막했던 숲 생태계는 이제 장엄한 합창단이며 오케스트라다.
늑대 무리는 함께 울부짖음으로 혼연일치가 된다. 견고한 공동체 생존력을 구축한다.
나치 치하의 집단수용소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유대인은 증언한다. “집단 강제수용소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나눠 가졌다. 우리 중의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나누지 않고 혼자 먹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그의 최후가 시작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기억하라. 자신만 보신(保身)하려고 분주한 사람은 리더는 아니다. 다양한 협력을 이끌어 낼 때 리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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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 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