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당선자는 모든 수입품에 10% 보편 관세를 부과할 태세다. [로이터]
“미국 조선업이 많이 퇴조했다. 한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7일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하며 대뜸 꺼낸 말이다. 12분간 이어진 두 사람의 첫 소통에서 가장 큰 관심은 한미 동맹이나 북한 문제가 아닌 조선 협력이었다. 트럼프 당선자는 “한국의 세계적인 군함과 선박 건조 능력을 알고 있다”며 “선박 수출뿐 아니라 유지 보수 정비 분야 등도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이날 증시에서 한화오션은 22%, HD현대중공업은 15%, 삼성중공업은 9% 급등했다. 한화오션은 12일 미 해군 유콘함 수리 사업도 수주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며 우리 경제에 미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낮은 관세율(평균 3.3%)이 미국 제품의 경쟁력과 일자리까지 빼앗고 있다고 믿는 트럼프 당선자는 모든 수입품에 10% 보편 관세를 부과할 태세다. 중국산 제품엔 60%, 일부 수입 자동차엔 2,000% 관세를 매기겠다는 으름장도 놓았다. 백악관뿐 아니라 상·하원도 모두 공화당이 장악하는 레드웨이브(Redwave)가 실현되며 정책 추진 동력도 확보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입장에선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미 무역수지는 역대 최대인 444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한국이 첫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수출은 연 448억 달러(약 62조 원) 줄어들고, 성장률이 1%대로 떨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연일 환율은 치솟고 증시는 하락세다.
그러나 트럼프가 당선 후 한국에 건넨 첫 메시지가 관세 선전포고가 아닌 조선 협력 요청이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제47대 미국 대통령에겐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MAGA·Make America Great Again)’ 게 가장 큰 책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이를 이루는 데 한국이 꼭 필요한 존재란 걸 각인시킨다면 기회를 찾을 수 있다.
사실 어느새 해양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을 미국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6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중국의 군함 수(234척)가 이미 미국(219척)보다 많아졌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미 해군정보국(ONI)도 미국의 연간 선박 건조 능력은 10만GT(총톤수)에 불과한 반면 중국은 2,325만GT에 달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대만을 사이에 둔 미중 전쟁 시뮬레이션 결과는 더 충격적이다. 단기전에선 미국이 군함 20척, 중국이 50척을 잃어 대만을 지켜내겠지만 선박 건조 능력이 큰 중국이 미국보다 빠르게 새 군함을 투입해 결국 승리할 것으로 예측됐기 때문이다.
2차 대전 당시 연간 1,000척도 넘는 선박을 건조하며 세계 최고를 자랑했던 미국 조선업은 냉전 종식으로 쇠락하기 시작, 이젠 시장점유율이 1%도 안 된다. 미국에서 운항하는 모든 선박은 미국에서 건조돼야 한다는 존스액트법에 안주, 경쟁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트럼프 당선자가 한국 조선 산업에 손을 내민 이유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면서 미중 충돌이란 큰 구도 속에서 트럼프 당선을 오히려 한국 경제 업그레이드 계기로 삼는 게 중요하다는 게 원로들의 조언이다. 조선업계 일각에선 미 군함이나 항공모함 건조에 참여하는 시나리오까지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한국도 중국 조선업의 추격이 위협적인 상황이라 윈윈이 될 수 있다. 미국 군함 건조 및 유지 보수 운영(MRO·Maintenance Repair and Operaion) 시장만 뚫어도 시간을 벌 수 있다. 미 해군 MRO 시장은 연간 20조 원 규모로 추정된다. 이를 교두보 삼아 1,500억 달러(약 200조 원) 규모인 글로벌 함정 시장으로 진출할 수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과 중국의 주력 산업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에서 트럼트 당선자가 중국을 압박하는 건 우리의 운신 폭을 넓혀준다”며 “악재보다는 호재에 집중하고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외교가에서는 트럼프 당선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가능성이 커진 데 따른 준비도 주문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자는 이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에서 “더 이상 전쟁을 확대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러시아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트럼프 캠프에선 현 상태에서 전쟁을 멈추고 비무장지대를 조성한 뒤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20년간 유예하는 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당선자는 줄곧 “취임 후 24시간 내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했다.
물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전쟁을 이대로 끝내는 데 흔쾌히 동의할 순 없는 만큼 종전 또는 정전 전망엔 회의적 시각도 많다. 한국전쟁처럼 휴전 협상에만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오히려 양국이 영토 확보를 위해 막판 총력전을 펴면 전황은 악화할 수도 있다. 북한군까지 참전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도 전쟁 피로감이 커지고 있다. 임성남 전 외교부 차관은 “트럼프 당선 전과 비교하면 전쟁 종식 가능성이 더 커진 건 사실”이라며 “전쟁이 하루아침에 칼로 두부 자르듯 끝나진 않겠지만 미리 앞을 내다보고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 등에 참여할 준비에 나서는 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도 2022년부터 국가재건회의를 발족시켜 전후 복구 계획을 수립해왔다. 주택 건설과 전력망 통합, 물류망 연결 등 15대 과제를 이행하는 데엔 총 7,500억 달러(약 1,000조 원)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됐다. 이를 원조와 대출, 투자유치 등으로 조달하겠다는 게 우크라이나의 구상이다. 올해초 세계은행(WB)도 향후 10년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총 4,860억 달러(약 680조 원)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지난해까지 피해를 토대로 추산한 금액이라 실제론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나라는 폴란드다. 3,000개 이상의 폴란드 기업이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관심을 표명한 데 이어 이미 300여 기업이 진출했다. 국영은행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전차와 장갑차, 자주포 등 군사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3국도 주택과 학교 건설 등에 참여하고 있다.
유럽연합(EU) 국가들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이 우크라이나의 친서구화를 촉진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공여된 자금의 상당 부분이 다시 EU로 환원되는 효과도 있고 난민도 줄일 수 있다.
유엔과 WB, 유럽부흥은행(EBRD)과 유럽투자은행(EIB) 등 국제기구들은 대부나 긴급 자금지원 형태로 참여를 모색하고 있다. 서방에서 압류하고 있는 러시아 자산 2,800억 달러(약 390조 원)가 활용된다. 주요 7개국(G7)과 EU는 지난 6월 동결된 러시아 자산에서 발생한 수익금을 담보로 총 450억 유로(약 67조 원)를 우크라이나에 대출해주기로 했다. 미 국무부도 지난해 러시아 기업인 콘스탄틴 말로페예프의 미국 내 자산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 명목으로 송금한 바 있다.
WB는 재건 사업 수요 분야로 교통, 주택 건설, 에너지, 사회 보호 등을 꼽았다. 한국이 주목할 분야는 에너지와 건설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하기 위해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구 소련식 모델인 기존 원자력 발전소 대신 신규 원전을 짓고 소형모듈원자로(SMR)도 20기 건설을 목표로 세웠다. 그린수소(태양광 또는 풍력으로 얻은 전기 에너지로 만든 친환경 수소) 인프라를 구축하고 신재생에너지도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주택 도로 철도 공항 복구도 노려볼 만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후보 공약집인 ‘어젠다47’(Agenda47)도 트럼프 2기의 미래 청사진인 만큼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젠다47에서 트럼프는 바이든 정부의 친환경 정책이 결국 에너지 가격 상승을 불러 전반적인 인플레이션을 야기함으로써 미국의 경쟁력을 떨어뜨렸다고 비판했다. 트럼프는 화석연료 채굴 및 공급 확대를 통해 에너지 가격을 하락시켜 물가를 잡고 미국을 다시 세계 최대 제조업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다.
물론 이러한 트럼프 2기의 화석 연료 회귀 정책은 상대적으로 전기차와 2차전지 배터리 산업엔 먹구름을 드리울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를 지지한 일론 머스크의 우주 기업 스페이스X에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가 납품될 것으로 알려지며 시장이 들썩였다. 트럼프 시대라고 배터리 업종에 반드시 악재만 있으란 법은 없다. 트럼프는 기본적으로 친기업 성향이고, ‘경제는 생물’이라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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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