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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황혼열차 낙수(落穗)

2024-12-13 (금)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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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열차(黃昏列車)를 타보니 열차의 종점인 종착역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황혼열차를 타기 전까지는 종착역을 지금처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

인생인고로 어쩌다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열차는 쉼 없이 달린다는 착각과 태만에 빠져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황혼열차로 갈아타게 되었다. “갑자기”라는 말이 뜬금없기도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아직 타지 않은 사람은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라고 표현해도 될 만치 황혼열차는 졸지에 내 앞에 와서 섰고 열차에 오른 그 시간부터 종착역에 대한 궁금증을 더 갖게 되었다.


황혼열차에 탑승하면 전에는 쉽게 스치고 지나치는 간이역(簡易驛)도 새삼스럽다. 하나 둘 셋 넷, 그러나 숫자를 제대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짧게 섰다가 가는 간이역의 무정함이나 스치고 지나치는 역사(驛舍)의 쇄락은 탑승자만이 느끼는 우울함이다.

오래 함께 해온 아내도 지레 내 슬픔을 짐작한다. 분명 저 양반이 전보다 말수가 줄어들고 가끔은 침울한 모양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까닭은 황혼열차의 종착역이 가까워지면서 생긴 우울증일 거라고.

정말 그런 생각은 착각이다. 우울해보이지만 단언컨대 우울증은 아니다. 은퇴를 했으니 말수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말할 대상이 대폭 감소한데서 생긴 자연스런 현상이다. 심지어 이미 황혼열차를 탄지가 한참 된 선배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무리하게 친구를 두지마라. 그냥 열차 밖으로 지나가는 풍광을 감상하면서 고독하게 살아라.”

고독이라는 단어가 고독해보여서 그렇지, 쉽게 말하면 상처를 받지 말라는 얘기다. 황혼열차를 타고 가는 인생은 자칫 상처를 받기 쉬운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이러니가 있다.

황혼승객들은 자기 상처 받는 건 몸서리치면서 남이 나로 인해 상처 받는 데는 무신경인 경우가 많다. 쓸데없는 말을 멈추지 않고 지나친 간섭을 즐겨한다. 반면에 별 일도 아닌데 삐지고 토라지고, 인간관계를 힘들게 한다.

그러므로 차라리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게 훨 현명하다는 결론이다. 교만하기는 또 얼마나 교만한가. 황혼열차를 타고 가는 인생을 무슨 벼슬로 착각하고 사사건건 고집 질에 훈계 질을 마지않으니 난감한 경우가 허다하다.

오늘도 황혼열차를 타고 달리며 만감이 교차한다. 해가 바뀌는 서쪽 하늘이 이렇게 잿빛인 것도 간만에 느끼는 감정이지만 그때마다 가슴에 품고 있는 추억이 스멀스멀 괴롭다. 그러나 그런 추억도 혼자 꺼내볼 일이다. 공연히 가족이랍시고 친구랍시고 꺼내놓다가 졸지에 주책이 될 수 있으니 명심할 일이다.


황혼열차를 타고 가는 오늘이 슬픈 게 아니고 지난 세월이 여진(餘塵)처럼 슬프다. 스냅으로 찍혀 황혼열차 창가에 주렁주렁 매달린 흔적들이 아프다.

황혼열차에 탑승한 어떤 승객이 묻는다. “아니 무슨 추억이 그리 많아 지금 당신을 우울하게 하는 겁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 되묻는다. “그럼 당신은 기뻐할 과거도 슬퍼할 추억도 없단 말입니까?” “없습니다. 여기저기 주머니를 뒤져도 이렇다 할 건덕지가 없어요. 저는 오히려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런 추억이 없을 것 같아 우울합니다.”

참으로 삶이란 다양한 족적들을 껴안고 있구나 생각한다. 추억이 없는 추억도 괜찮을 듯싶다. 그런데 어찌하여 황혼열차는 빠른 것인가. 삶의 연륜이 열차의 속도에 비례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한 70마일 정도라면 시시때때로 장관(壯觀)을 본다. 그러나 80마일을 넘어 갈 때면 열차의 속도감에 공포를 느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속도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광분(狂奔)하는 인생도 더러 있을까.

황혼열차 승객은 자기 분수를 차분히 인식하고 종착역에서 내려 어떤 숙소로 갈지를 살피는 게 좋다. 그때 거기서 만나는 날씨는 화창하기를 기대한다. 분명 환승(換乘)하는 분도 있을 텐데 그가 환승하기 위해 역사에 머무를 때 굵고 검은 빗방울이 내리면 아주 추울듯하다.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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