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군주제에서는 온 나라가 군주의 소유물이었고 그 안에서 저질러진 모든 범죄도 군주에 대한 범죄였다. 따라서 죄인을 벌주는 최종 권한도, 또 그를 용서하는 권한도 군주에게 있었다.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군주에게 사면권이 주어진 것은 그 때문이다.
8세기 영국 웨섹스의 왕 이네는 서양에서 처음으로 왕에게 사면권이 있다는 것을 법으로 만들어 남긴 사람이다. 그가 제정한 ‘이네법’은 훗날 그의 자손이자 영국을 바이킹의 습격으로부터 지켜 영국왕 중 유일하게 ‘대’자가 붙은 웨섹스의 알프레드 대왕의 법전에 포함돼 영국법의 바탕이 된다.
미 ‘건국의 아버지들’은 독립 전쟁을 일으켜 영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영국법의 전통은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대통령의 사면권이다. 과거 군주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고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미국 대통령 사면권에도 거의 제한이 없다. 유일한 예외는 탄핵당한 것을 취소할 수 없고 사면 대상이 연방법 위반에 국한된다는 점이다. 주법을 위반한 경우는 대통령이 아니라 통상 주지사가 사면권을 갖게 된다.
한국 대통령은 범죄를 저질러 기소되거나 형이 확정된 사람만 사면할 수 있고 특정 범죄를 저지른 사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 사면은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지만 있지만 미국 대통령은 그럴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 아직 기소되지 않은 사항에 관해서도 포괄적으로 사면할 수 있다.
헌법이 제정될 당시 반연방주의자들은 군주제 하에서 사면권이 악용되는 사례를 들며 그 폐지를 주장했지만 판사도 사람이니만큼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민 통합 차원에서 정치적 사면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우세해 결국 포함되게 됐다.
이렇게 마련된 사면권을 처름 사용한 사람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었다. 그는 이를 1794년 일어난 ‘위스키 반란’ 참가자들을 사면하는데 썼다. ‘위스키 반란’이란 연방 정부가 처음으로 세수 마련을 위해 물품에 세금을 매긴데 항의해 서부 펜실베니아 농부들이 세무 공무원을 습격한 사건으로 군대가 동원돼 150명의 주동자를 체포했으나 워싱턴이 국민 통합 차원에서 이들을 모두 사면해주고 말았다.
19세기에는 링컨 암살로 뒤를 이은 앤드루 존슨이 남부와의 화해를 위해 남부 연맹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를 비롯 지도자를 사면해 줬고 20세기 들어서는 역시 닉슨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제럴드 포드가 닉슨에 대한 포괄적 사면을 시행했다. 이 사면으로 포드의 인기는 급락하고 1976년 대선에서도 패했지만 장기적으로 국민 통합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런 사례는 공익적 차원에서 사면권이 사용됐다고 볼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도 많다. 그 중 하나가 아버지 부시 때 이란 콘트라 스캔들이 휘말려 기소되거나 유죄 평결을 받은 관리 6명을 사면해 준 일이다.
이보다 더 질이 나쁜 것은 빌 클린턴이 2001년 1월 20일 임기 마지막 날 탈세등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다니던 억만장자이자 후원자 마크 리치와 자신의 이복 동생이자 마약 거래 혐의로 복역한 기록이 있는 로저 클린턴을 사명해준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공익적 측면도 없어 사면권 남용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지난 주 바이든 대통령은 불법 총기 소지 및 탈세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기다리고 있던 아들 헌터 바이든에 대한 포괄적 사면을 실시했다. 이번 사면은 이들 범죄뿐 아니라 헌터가 우크라이나 개스 회사인 부리스마 이사로 재직하고 있던 2014년부터 올 12월까지 그가 저질렀을 수 있는 모든 범죄에 대한 포괄적 면죄부를 주고 있다.
이 또한 공익이 아니라 사익을 목적으로 한 사면권 남용일뿐 아니라 수차례 거듭된 사면 불가 약속을 뒤집은 것이다. 바이든은 사면 이유를 설명하면서 헌터가 표적 수사의 희생양이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자신이 임명한 메릭 갈랜드가 법무장관으로 있는데 누가 대통령 자식을 표적 수사한단 말인가. 그의 이번 결정으로 훗날 도널드가 자기를 지지하다 감옥에 간 1.6 폭동 관계자들이 편파적으로 기소됐다며 사면해주더라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바이든은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세 자식중 하나는 교통 사고로, 또 하나는 뇌암으로 잃었고 헌터만 남았다. 그가 그대로 물러날 경우 바이든 일가를 ‘바이든 범죄 가족’이라 부르고 공공연하게 보복을 외쳐온 도널드가 헌터를 그냥 놔둘리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그의 아버지로서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법 앞의 평등’이라는 공화국의 중요한 가치가 훼손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때 민주주의 선진국을 뽐내던 미국의 위상이 계속 추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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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