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인 가운데 음모론으로 뜬 사람을 들라면 도널드 트럼프가 첫손에 꼽힐 것이다. 그가 처음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오바마가 하와이에서 태어나지 않아 미국 시민 자격이 없고 따라서 대통령도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부터다.
그가 편 음모론은 이것만이 아니다. 2016년 대선 때는 같은 공화당내 경쟁자였던 테드 크루즈 아버지가 케네디 암살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크루즈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히기 위해 조작됐다는 사실이 ‘내셔널 인콰이어러’ 발행인 데이빗 페커의 실토로 밝혀졌다.
도널드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포트 낙스에 보관된 연방 정부 소유 금이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펴는가 하면 오바마가 백악관에서 체포돼 수감되는 가짜 비디오를 소셜 미디어에 올리기도 했다.
음모론의 대가이자 최대 수혜자였던 도널드가 요즘 자신이 퍼뜨린 음모론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한때 그의 절친이었던 결별한 일런 머스크에 의해 터졌다. 최근 의회에서 통과된 감세법안을 놓고 도널드와 충돌한 머스크는 소셜 미디어에 아동 성착취범으로 기소돼 감옥에 갇혔다 자살한 제프리 엡스틴 파일에 트럼프 이름이 있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한 때 억만장자로 빌 게이츠, 빌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등 정재계 인사들과 교류한 엡스틴은 수많은 미성년자들을 성노예로 삼아 착취해왔는데 그와 함께 범죄를 저지른 인물 명단이 존재하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딥 스테이트’(deep state)라 불리는 정부내 비밀 조직이 그를 살해했다는 음모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 음모론을 앞장서 부추긴 것이 도널드고 이를 신봉하는 주요 세력이 MAGA다. 도널드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를 공개하겠다고 공언해왔다. 그런데 이달 초 연방 법무부가 이와 관련된 어떤 문서도 더 이상 공개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이 파일 공개만을 기다리고 있던 MAGA 진영에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여기다 월스트릿 저널은 팸 본디 법무장관이 엡스틴 파일에 도널드 이름이 여러 차례 나온다는 사실을 보고했다고 보도하면서 기름을 부었다. 한때 도널드의 소통 국장이었던 앤소니 스카라무치는 “일론이 옳았다”고 분노를 터뜨렸으며 역시 도널드의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마이클 플린은 “엡스틴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며 이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도널드의 책사로 잘 알려진 스티브 배넌도 이 문제를 덮으면 MAGA 지지자의 10%가 떨어져 나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앞으로 선거에서 연방 의석 40석과 대통령 자리도 잃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널드의 충실한 추종자인 마이크 존슨 연방 하원의장마저 엡스틴 파일은 가짜가 아니며 이와 관련된 모든 서류를 공개할 것을 촉구했다. 일부 MAGA 인사들은 본디 법무장관이 2월까지도 자기 책상에 이 파일이 있다고 말했다며 그녀를 즉시 해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사태가 가라앉지 않자 도널드는 오바마 전대통령이 반역을 저질렀다며 또 다른 음모론으로 화제를 돌리려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퍼뜨리고 자기 추종자들이 신봉하는 엡스틴 파일에 대한 말을 하루 아침에 뒤집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심리학회가 미국과 영국 등 참가자 15만8천명을 상대로 한 170개 조사 보고서를 분석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음모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는 보통 사람과 조금 다르다. 이들은 대체로 불안 증세와 편집증적 성향을 보이며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며 의심이 많고 이기적이며 괴팍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JFK 암살에 공범이 있다는 것에서 9/11 테러가 내부자 소행이라는 설, UFO와 외계인 착륙설 등 미국 사회에 음모론이 떠돈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요즘 같이 파괴력을 가진 적은 없다. 그렇게 된 것은 자동화와 세계화로 한때 중산층이었던 많은 사람이 하류로 전락하고 빈부격차가 거치면서 불안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도널드처럼 이들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이 이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와 엡스틴이 오랜 전부터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관한 보고서에 도널드 이름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며 이것만으로 그가 범죄와 연루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범죄 혐의가 있었다면 바이든 행정부가 이를 덮었을리 없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번 사건으로 MAGA 진영은 도널드 재집권 이후 첫번째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음모론으로 뜬 자 음모론으로 지는 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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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