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 중에 하나가 남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내가 남을 배신하는 경우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이런 저런 배신을 당했노라 말은 잘하는데 막상 자기가 남을 배신했다는 얘기는 들어볼 수 없다.
인생사가 다 그렇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만 생각하니 남 억울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저지른 배신은 이미 망각의 늪으로 밀어 넣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
재미난 일은 배신을 때리거나 남을 억울하게 만들어 불면의 밤을 제공한 사람이 대개는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과는 쉽게 관계를 맺기 어려우니 결국은 가까운 사람, 특히 가족 인척 친구 지인을 상대로 배신의 덫을 놓게 된다.
매스컴에 등장하여 공분을 일으키게 하는 사람들의 사연도 들어보면 가족 때문에 가슴을 치고 친척 친구가 슬픔의 원인이며 심지어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다.
배신 중에도 슬픈 배신은 남녀의 배신이다. 배신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세상에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가 바로 연인사이요 부부사이가 아닌가. 그런 관계 속에 배신은 존재한다. 아니 배신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물론 서로는 상대편이 배신했다고 주장하겠지만 이 글은 그런 편 가르기 논쟁이 아니다. 누가 누구를 배신했건 배신의 종말은 아프고 슬픈데도 끊임없이 배신은 이뤄지고 있는 인간사가 놀랍다는 뜻이다.
배신과는 거리가 한참 멀 것 같은 교회는 어떤가. 거기서도 역시 배신은 숨을 쉰다. 세상살이보다 더한 배신 파당 분쟁이 넘나들고 있다. 교인들은 별 저항 없이 교회를 떠나기도 하지만 목사가 다른 임지를 쳐다보면 배신자라는 폄하를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세태는 전과 다르다. 목사가 신적 존재로 취급당하는 우스운 일도 자취를 감췄지만 너무 인간 냄새를 풍기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인간 냄새는 차라리 점잖은 편이고 아예 체면도 염치도 없이 추락하는 이들이 많다. 아마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편에서나 교회 편에서 배신자가 아닐까 싶다.
이런 인간의 표리부동한 얼굴에 대해 로치의 ‘근친반발의 법칙’이라는 말이 나왔다. 배신 안 할 것 같은 사이에서 배신이 나온다는 말이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종 선거에서도 후보자와 가장 가까운 측근이 정작 표를 찍을 때는 슬쩍 다른 후보를 찍는다는 얘기는 이 설(說)의 핵심이다.
회원이 몇 안 되는 무슨 단체나 모임에서도 회장 선거를 할 때 표계산을 하고 당선을 확신했는데 막상 개표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열성적으로 도왔던 사람이 표를 주지 않은 결과다.
그런데 그런 못난 일을 그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 나도 할 수 있으니 너무 가슴 아파할 일은 아니다. 모든 뒷 담화도 누가 하는가. 잘 아는 지인이나 친구 친척사이에서 생기는 일이지 생판 모르는 사람이 씹을 리가 없다.
위대한 영웅 줄리어스 시저가 비명에 간 것도 적군의 칼이 아니라 양아들 부르터스를 비롯한 동료 우파의 무참한 배신의 칼로 죽고 말았다. 한고조를 패배시킨 영웅적 인물 목돌선우도 그 자리에 오를 때 아내를 죽이고 부왕을 죽인 비정한 인물이었다.
패왕별희(覇王別姬)의 주인공 항우도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들으며 자결한 이유 역시 측근들의 배신 때문이었고 그런 경우는 조선의 역사에도 수없이 등장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궁정동의 슬픈 역사도 그런 배신에 한 줄을 더하지 않았는가.
근친반발의 법칙은 탁월한 이론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진리 역시 근친반발의 전형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방법이 없다. 작은 이익이라도 당신에게 올 때, 그 좋은 기회가 당신이 찌르는 배신의 칼로 보장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니야! 나는 그럴 수 없어. 나는 그 칼을 던져버릴 거야!” 일단 당신의 이 호언장담을 믿어보겠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
신석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