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타파웨어’, 주부들만 불러서 팔았다…성차별인가, 아닌가

2024-10-16 (수) 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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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재의 식사 - 타파웨어의 영업 전략

지난 17일 세계 최초의 플라스틱 밀폐 용기 업체인 터퍼웨어(Tupperware·이하 타파웨어)가 파산을 신청했다. 몰락의 원인은 실로 다채롭게 꼽을 수 있다. 음식을 사 먹고 시켜 먹으며 밀키트도 잘 나오는 요즘, 사람들은 예전만큼 음식을 만들어 먹지 않는다. 밀폐 용기의 수요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편 혜성처럼 등장해 최첨단 소재 대접을 받았던 플라스틱은 여러모로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타파웨어가 그런 흐름에 맞추기 위한 혁신을 게을리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자음접변 현상으로 국내 공식 명칭은 ‘타파'웨어인 터퍼웨어는 ‘제록스'처럼 브랜드명 그 자체가 플라스틱 밀폐 용기의 통칭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위상이 꽤 타당하다. 타파웨어는 1942년 미국인 사업가이자 발명가 얼 터퍼(1907~1983년)가 발명했다.

■전후의 가난$ 타파웨어 수요 급증


1940년대 초중반이라는 시기를 보면 대략 감이 잡히듯 타파웨어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직간접적 산물이었다. 일단 직접적으로는 각종 군수품을 위한 신재료의 개발이 영향을 미쳤다. 정유의 부산물 가운데 폴리에틸렌 찌꺼기가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소재를 개발하라는 업무 지시가 터퍼에게 내려왔다. 터퍼는 검은색에 신축성도 없는 찌꺼기를 정제해 투명하며 가볍고 쉽게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을 개발했다.

이 소재는 용기와 컵, 접시, 심지어 2차 세계대전에 쓰인 방독면까지 만들 정도로 꽤나 유용했다. 터퍼는 한발 더 나아가 액체가 새지 않는, 밀폐 뚜껑이 딸린 식품 용기를 개발해냈다. 페인트 깡통의 뚜껑에서 착안한 디자인이었다. 플라스틱 밀폐 용기가 좋은 사업거리라 내다본 터퍼는 1938년 터퍼웨어 플라스틱스 컴퍼니를 설립하고 1948년에 공구상과 백화점에 밀폐 용기를 납품하기 시작한다.

또한 타파웨어는 넉넉하지 못한 시대상을 반영한 제품이었다. 전쟁을 치러낸 뒤였으니 살림살이가 아무래도 여유로울 수 없었다. 작은 것이라도 아껴야만 하는 가운데 음식의 보존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음식을 최대한 오래 두고 먹어야만 하는 형편 속에서 밀폐를 통해 보존기간을 늘려주는 타파웨어의 잠재적 수요는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제품만 좋아서 될 일은 아니었으니, 적절한 홍보가 필요했다.

상품을 소매점에 납품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택한 뒤에도 다른 판로를 고민하던 터퍼에게 한 여성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브라우니 와이즈(1913~1992년)였다. 미국 조지아주 태생인 와이즈는 이혼 후 외동아들을 데리고 미시간주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는 한동안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부상병들을 위한 응급처치 클리닉을 운영했다.

■파티 플랜, 타파웨어에 날개를 달다

전쟁이 끝나자 와이즈는 철수세미 등 각종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스탠리 홈 프로덕트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스탠리 홈 프로덕트는 최초로 ‘파티 플랜(Party Plan)' 전략을 채택한 기업이었다. 생활용품의 흥망성쇠가 주부들의 평판과 구매력에 좌지우지된다는 점에 착안해 여염집에서 파티를 개최하면서 자연스레 제품을 홍보하는 전략이었다.

와이즈는 남편은 일터로,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주부들이 한가한 낮 시간을 골랐다. 이웃과 교류가 활발한 집을 택해 주부들을 대상으로 파티를 열고 제품을 홍보하고 팔았다. 장소를 제공하고 모객에 일정 수준 기여한 사람에게는 제품을 선물하고 판매액의 일정 비율을 커미션으로 지불했다.


성과가 좋았던 와이즈는 스탠리의 임원 자리를 노렸지만 쉽지 않았다. 스탠리 창업주인 프랭크 베버리지는 “관리직은 여성의 자리가 아니니 시간 낭비하지 말라"며 그의 기세를 꺾었다. 결국 스탠리를 퇴사한 와이즈의 시야에 타파웨어가 포착된다. 앞서 말했듯 전쟁 이후 알뜰한 살림에 대한 압박 속에서 음식을 오래 보존해주면서도 가볍고 튼튼한 신소재 플라스틱 밀폐 용기의 잠재력은 대단해 보였다.

와이즈는 1946년 미시간주에서 터퍼가 있는 매사추세츠주로 장거리 전화를 건다. 스탠리에서 자신의 활약을 소개하고 파티 플랜을 통한 소비자 직판의 가능성을 설파했다. 가능성을 감지한 터퍼는 와이즈를 영입해 파티 플랜을 통한 직판을 시도했다. 제품을 철저하게 파악부터 한 와이즈는 영업사원들에게 제품의 내구성 증명을 위해 “타파웨어를 던지라"고 하는 등 적극적인 홍보를 강조했다.

파티 플랜을 활용한 타파웨어의 판매는 대성공이었다. 판매 수요에 맞추고자 1949년 10월까지 와이즈는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지역에서만 19명의 딜러를 고용했다. 그들은 전부 약 15만 달러의 타파웨어를 팔았으니, 어떤 소매점을 통한 매출보다 우월한 실적이었다.

■타파웨어 영업사원, 여성 최초 '비즈니스 위크' 표지모델로

이런 활약 덕분에 와이즈는 스탠리에서 이루지 못했었던 임원의 꿈을 마침내 실현했다. 1951년 터퍼가 그를 부회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한편 같은 해 와이즈의 의견을 수용해 타파웨어는 제품 전량을 소비자 직판으로만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소매점을 거치지 않고도 타파웨어는 1952년 200만 달러로 전년에 비해 상당히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와이즈도 한동안 부와 명예를 즐겼다. 1952년 2만993달러(2021년 기준 21만3,606달러·약 2억8,500만 원)의 연봉을 받는 한편, 타파웨어로부터 호숫가의 단독주택도 받았다. 그의 파티 플랜 홍보 전략 또한 규모가 커져서 1954년부터는 1년에 한 번 결산 기념행사를 열기 시작했다. 높은 판매고를 올린 여성들을 한데 모아 치르는 사은 행사였다.

결산 행사는 매년 다른 주제로 열렸다. 1954년의 주제는 서부 개척시대의 분위기에서 착안한 ‘빅 디그(Big Dig)'였다. 19세기 중반 골드러시로 엄청난 인파가 서부로 몰려 금을 캐내고자 땅을 파댄 것처럼, 각종 선물과 보석류를 땅에 묻고 여성들이 캐내서 가지는 행사였다.

이처럼 갈수록 커지는 타파웨어의 규모와 성공에 힘입어 와이즈는 1954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 위크'의 표지에 등장했다.

<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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