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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상] 가을의 시각

2024-10-15 (화)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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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인데 약 5년 만에 다시 보았다.

5년 전 본 영화니까 다시 본다는 데 대해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기 시작한지 30분도 안되어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화는 완전히 다른 영화였다. 내가 자신 있게 생각했던 기생충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특히 마지막 장면이나 대사 등은 기억 속에 없는 다른 영화였다. 독자들은 이미 이 글의 뜻을 이해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릴 것이다. 한번 봤다고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한번 읽었다고 그 의미를 십분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바보다.


몇 년 전 어느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주제는 여행에 관한 것이었다. 그분은 이미 갔던 곳으로 몇 년 후 다시 가는 버릇이 있다고 말했다. 그가 갖는 여행의 감동은 두 번째 세 번째 같은 곳으로 갔을 때 이뤄진다고 술회했다. 나는 이 말에 동의 한다. 여행도 독서도 영화나 드라마도 단번의 대면으로 다 알고 이해한다고 단언하지 말자.

특히 책은 더욱 그렇다. 한번 읽은 책을 다시 읽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도 꾹 참고 다시 시도하면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 있다. 고전이나 명저는 옆에 두고 시간 나는 대로 한 장이나 두 장 계속 읽어도 좋다. 크리스천은 성경을 몇 독씩 하는 이도 있다. 그들도 아마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다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요지는 시각에 있다. 어떤 눈으로 보는가, 그것이 삶의 중요한 포인트다. 작년의 가을과 금년의 가을이 달라야한다. 아니 달라질 것이다.
오래전 읽었던 글인데 감동이 있어 메모를 해두었다. 1800년대 영국의 성자로 불리는 메케인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역에 멈추게 되었다.

그때 기차 화부가 화덕을 열고 석탄을 넣었다. 그 옆에서 화덕 속에 붉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던 메케인이 화부에게 조용히 물었다는 것이다. “여보시오. 당신은 지금 저 맹렬한 불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순간 화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늘 보는 불꽃이었기에 달리 특별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날 이후 화부는 불꽃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자꾸만 그 질문이 생각났으므로 불꽃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불꽃이었는데 그 불꽃을 통해 영혼의 눈을 뜨게 되는 모멘트가 되었고 화부는 드디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관점이 옳게 작용하면 옳은 내용을 발견하고 마침내 긍정적인 결론을 얻게 되는 교훈이 이 안에 있다.

가을이다. 계절 중에 가을은 자신을 성찰하는 계절이다. 해마다 가을은 온다. 인생은 수없는 가을을 경험하며 산다. 자기 나이만치 가을을 맞고 보낸다. 그러나 인생의 삶에서 무서운 건 매너리즘, 둔감한 면역이다. 그러려니 생각하는 습관이다.

신이 우리에게 준 가을은 은혜이건만 우리는 그 은혜를 누릴 줄을 모른다.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고 수확의 계절이며 감사의 계절이다. 이런 정의가 틀리지는 않으나 가을은 다시 보고 다시 느끼는 계절이다.


내 안에 침잠되어있는 이기적인 나, 단편적이고 주제넘은 자아를 성찰하는 계절이다. 천사는 정말 내 곁에 있는데 보지 못할 뿐이라는 말이 있다. 한번 보고 한번 알았다고 그것이 참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한다. 화덕의 불꽃을 다시 본 화부처럼 오늘 이 글을 읽고 가을을 다시 보기 바란다.

가을은 반드시 높은 하늘이나 청량한 바람이나 붉은 단풍과 낙엽에 있지 않다. 어쩌면 가을은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달력을 한 장 뜯어내는 그때 가을이 성큼 내 안으로 들어오거나 반 팔 옷을 긴팔로 바꾸는 어느 날 아침 서늘한 느낌으로 가을을 만질 수도 있다.

5년 전 “기생충”과 5년 후 “기생충”은 전혀 다른 작품이듯이 작년에 만난 가을과 금년 가을이 완연히 다르기를 기대한다. 들린다고 그게 다 소리가 아닌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은 진리다.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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