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LA필하모닉의 새 시즌 새 기대

2024-10-09 (수) 정숙희 논설위원
크게 작게
LA필하모닉의 2024-25 시즌이 시작됐다. 지난 1일 LA필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오프닝 갈라 콘서트를 갖고 새로운 시즌을 축하하는 개막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이날 구스타보 두다멜 음악감독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는 피아니스트 랑 랑과 함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을 협연했고, 아르헨티나 작곡가 히나스테라의 발레음악 ‘에스탄시아’를 연주했다. 흥겨운 기운이 넘쳐났고 마지막에는 천정에서 색종이조각들이 쏟아져 내리는 콘페티까지, 화려한 축제 분위기가 가득한 음악회였다.

하지만 랑 랑은 여전히 실망스러웠다. 오래 전 그의 과장된 제스처에 학을 뗀 후 연주를 보기는 실로 오랜만인데, 과거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아직도 겉멋이 잔뜩 들어간 손짓과 몸짓과 표정들은 청중을 의식한 일종의 쇼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의 연주는 늘 감정의 분출이 과도해서 속도를 마음대로 늘이고 줄이며 기교 과시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이날도 가뜩이나 감상적인 라흐 2번을 어찌나 느끼하게 연주하던지 ‘다시는…’이란 결심을 곱씹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보이는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은지, 특히 중국인들이 많았던 이날의 청중은 열렬한 환호와 기립박수를 보냈다.


랑 랑은 임윤찬의 대척점에 서있는 피아니스트란 생각을 했다. 하필 바로 그 사흘 전인 9월28일 임윤찬이 워싱턴 DC의 케네디센터에서 똑같은 곡을 연주했다.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NSO)의 시즌 오픈 콘서트에서였다. 다음날 나온 ‘워싱턴 클래시컬 리뷰’를 보니 극찬에 극찬이 이어진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주, 빠른 스피드로 관객을 흥분으로 몰아넣는가 하면 라흐 2번의 지나치게 감상적인 면에 빠지기를 거부하는 담담한 연주, 뛰어난 실력을 공허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 깊이와 감동을 주는 해석, 특히 3악장에서는 터보엔진이 달린 듯한 템포와 경이로운 테크닉으로 오케스트라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화산이 분출하는 듯한 연주를 들려주었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왜 중국 출신의 스타 피아니스트들은 음악의 본질이 아닌 음악 외적인 것들에 몰두할까? 랑 랑은 광대 같은 표정과 제스처로, 유자 왕은 노출 심한 패션과 킬 힐로 청중을 매혹시키려한다. 두 사람 모두 대단한 실력을 가진 피아니스트들인데, 이들을 떠올릴 때면 연주가 아니라 그 이상한 얼굴표정과 짧은 드레스가 생각난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이날은 두다멜의 16번째 시즌 오프닝 나잇이었다. 2009년 그의 첫 갈라 콘서트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벌써 15년이 지났다니 참으로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 있을 그의 17번째 시즌 개막공연은 LA필과 함께하는 마지막 갈라 콘서트가 될 것이다.

그런데 슬퍼하기 전에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의 임기가 아직 2년이나 더 남았다는 사실이다. 작년 초 두다멜이 LA필을 떠나 뉴욕필로 간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너무 충격이 커서였는지 사람들은 그가 금방 떠날 것처럼 애석해 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많은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이미 두다멜을 떠나보낸 듯하다. 하지만 발표 당시 사임 시점은 3년 후였고, 두다멜은 이번 시즌(2024-25)과 다음 시즌(2025-26)까지 LA에서 활동한 후 그 다음 시즌(2026-27)에야 뉴욕 필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클래식 음악계는 적어도 2~3년 전부터 프로그램을 만들기 때문에 지휘자의 사임과 부임도 넉넉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벌써부터 두다멜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 세계무대에서 최고 지휘자로서 커리어의 정점에 오른 두다멜(43)은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LA필과의 연주 일정도 많이 줄어들었다. 올 여름 할리웃 보울에도 두달이나 자리를 비웠다가 8월29일 임윤찬과의 베토벤 5번 ‘황제’ 협연 때 처음 등장했고, 9월12일 오페라 아리아의 밤까지 9회 연주했을 뿐이다.

살짝 우려되는 것은 지금이 LA필의 과도기라 해도 좋을 불안정한 시기라는 점이다. 지난해 두다멜의 사임발표에 이어 채드 스미스 회장이 보스턴 심포니로 떠났고, 1년 이상 최고경영자 자리가 공석이다가 바로 두달 전 새 수장을 맞았다. 지난 7월초 LA필의 신임 회장 겸 CEO로 부임한 킴 놀테미(Kim Noltemy)는 달라스 심포니의 성장과 변혁을 주도해온 인물로서 음악계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하지만 아직 LA필에서의 능력과 방향을 가늠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호기심과 걱정이 겹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울러 최근 여러 명의 수석 연주자들이 오케스트라를 떠난 것도 약간의 동요를 느끼게 한다. 수석 부악장 네이선 콜을 비롯해 비올리스트 수석과 오보이스트 수석이 떠났으니 그 포지션들이 채워질 때까지는 완벽하게 안정적인 사운드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다멜의 후임을 정해야하는 특급미션이다. 물론 운영진은 다양한 경로로 새 음악감독을 물색하고 있을 것이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올해 할리웃보울 클래식 프로그램의 오프닝을 장식한 엘림 찬(Elim Chan, 36)이 유력 후보의 한 명으로 거론되는 듯하다. 홍콩출신으로 현재 벨기에 앤트워프 심포니의 음악감독인 엘림 찬은 유명한 여름축제 BBC 프롬스의 올해 개막공연도 꿰찼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 지휘자로, LA필 단원들과 기막힌 호흡을 보였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만약 그를 낙점한다면 LA필은 아시안 여성을 음악감독으로 기용하는 최초의 주요 오케스트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 디즈니홀 포디움에 서는 젊은 지휘자들은 오케스트라와 운영진이 선을 보는 후보들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그 중에는 내년 1월말에 오는 김은선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음악감독도 있다.

<정숙희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