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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남길 것과 비울 것’

2024-08-19 (월) 조광렬/수필가·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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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한인기독교방송계의 개척자며 큰 별이신 김영호 전 대뉴욕지구한인장로연합회장이 향년 92세로 지난 7월 20일 하나님안에서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 김장로님을 사랑하며 존경하던 한 사람으로 이 땅에서는 더 이상 뵙지못하게 됨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지난 8월 4일, 뉴욕거주 우리 몇몇은 택시를 대절하여 메릴랜드주 워싱튼 DC 인근 Silver Spring소재 하인즈 퓨너럴홈에서 있었던 김영호장로님 영결식 예배에 다녀왔다.
60여년간 방송에 몸담아 온 한국 TV 방송 역사의 산증인이었던 김장로님은 1954년부터 KBS 아나운서로 방송 생활을 시작해 1961년 12월31일 대한민국 최초의 TV 방송 첫 화면을 장식했다.

이후 KBS 아나운서 실장(1958~1966)을 거쳐 미국의 소리(Washington DC 1966~1969), 88 Olympic 다국적송출방송책임자(1986~1988)를 역임했고, ‘11시에 만납니다 김영호입니다’ 토크 쇼를 진행,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 장로님은 전미 최초로 1971년 우리말 방송을 시작한 ‘워싱턴 기독교 방송국’을 비롯해 뉴욕의 미주기독교방송(KCBN)까지 미주에만 총 6개의 기독교 방송국을 직접 설립하셨다.


80이 넘어서도 CTS-기독교 TV 뉴욕지사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제34회기 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뉴욕에서 활동하신 김영호 장로님 내외와 우리들은 오랜동안 정기적으로 최소한 한달에 한번은 꼭 만나 정을 나누던 사이로 2021년 자식들의 권유로 워싱턴DC 인근 실버타운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만남은 이어졌었다. 그러나 이주 후 통화할 때마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살고 싶다는 하소연을 자주하셨다.

김영호 장로님은 가정의 안위보다 하나님 나라 확장에 더 열성이셨다. 돈하고는 거리가 먼 분이셨고 법 없이도 살수 있는 순수하고 깨끗한 분이셨다. 그래서 사모님이신 김숙자 권사님이 고생이 크셨다. 그러나 강한 생활력과 의지의 소유자이신 사모님은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자손들을 모두 훌륭히 카워내셨다.

이민생활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너무 가까이하면 다치기 쉽고, 너무 멀리하면 해코지하므로 적당한 거리를 두라)의 대인관계가 제일이라는 말도 있다.

대인관계는 아주 가까운 한 두 사람과의 교류가 좋으며 일상의 인간관계는 멀리도 가까이도 하지 말고 살아가는 것이 후회 없는 인간 관계라고들 하지만 김 장로님과 우리들 관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이번의 짧은 여행은 노인들에게는 정 만큼 귀한게 없다는 것을 새삼 깨우쳐 주었다.

자식이 가까이 살아도, 아무리 많은 재산도, 화려한 집도, 아름다운 경치도 행복을 줄 수가 없다. 정을 나눌 친구가 늘 곁에 있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란걸 고백하시는 권사님을 뵙고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남지 않은 내 인생(人生)의 잔고(殘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졌다.

나이가 들수록 그 동안 살아 온 삶을 반추해 어떤 잔고(殘高)가 얼마나 남았는지 돌아보는 과정도 필요하다. 인생의 잔고 중에는 남길수록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떠나기 전에 깨끗이 비워야 하는 것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니 이런 결론을 얻는다. 그 ‘남길 것’ 세가지는 1.가족에게는 그리움을 2. 친구에게는 웃음을 3.세상에는 감동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았던 세상살이를 마치면서 감동 하나쯤 남기고 떠나는 것이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비워야 할 것’ 세가지는 1.마음의 빚 2.마음의 응어리 3. 정(情)이다. 친구에게는 우정의 잔고, 반쪽에겐 애정의 잔고를, 세상에겐 인정의 잔고를 바닥까지 긁어 아낌없이 나눠줘야 죽을 때 후회없이 떠날 수 있기에-.

늘 누구에게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던 김 장로님, 멋진 목소리와 잘생긴 얼굴, 내가 그려드린 초상화를 받고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김 장로님의 영결식 식순의 표지 제목 [A Celebration of Life]가 인상적이었다. 영결식을 통해,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자세야말로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가치있는 잔고라는 귀한 교훈을 얻고 돌아옴에 감사한다.

<조광렬/수필가·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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