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LA타임스에 나온 두 가지 뉴스가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한국 발 기사, 10년전 한 전직 수학교사가 서울 외곽의 주말농장에 바나나 묘목을 심었고 공들여 재배한 끝에 올여름 드디어 바나나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는 것이다. 아열대 작물인 바나나가 온대지역에서 열리다니, 이 신기한 광경을 보러 연일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것이 지구온난화의 명백한 증거라 말하고 있다.
또 다른 기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60년 후 기온을 예상한 지도를 보여준다. 메릴랜드대학 환경과학센터가 개발한 매핑 도구에 따르면 화석연료 사용이 지금처럼 계속될 경우 2080년 LA는 여름이 7.7도, 겨울은 5.6도 더 더워져서 샌버나디노 카운티의 리알토 시의 기후와 비슷해진다. 또 샌프란시스코는 여름이 8.5도, 겨울 6.4도 더 따뜻해져 샌디에고 인근 도시들과 같아지고, 북가주 레딩의 삼림지대는 애리조나주의 건조관목지대처럼 변하게 된다.
NASA 기후연구소의 예측도 비슷하다. LA의 8월과 9월은 이미 20세기 초보다 7~8도 더 올랐기 때문에 2080년이 되면 알제리나 요르단과 비슷해진다. 또 뉴욕은 텍사스, 시카고는 오클라호마, 마이애미는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변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자녀세대의 일이다.
이제 기후변화는 되돌릴 수 없는 티핑포인트를 넘어섰다. 해마다 여름은 더 더워지고, 홍수와 가뭄은 더 심해지며, 산불은 더 커지고, 바닷물은 더 높아진다. 에어컨디션을 달고 사는 우리는 크게 체감하지 못하지만 이를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땅을 파서 물을 대고 농사짓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들은 이 문제에 가장 민감하다. 그해의 날씨가 포도수확량은 물론 와인의 맛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와인용 포도는 재배환경에 예민해서 한 해의 태양과 비, 기후조건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또 각 포도품종은 저마다 좋아하는 재배환경이 달라서 더운 지역에서 잘 되는 품종이 있는가 하면 서늘한 곳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품종이 있다. 인류는 수천년의 경험에 의해 어떤 지역에서 어떤 포도가 잘 자라는지를 알고 있고, 그 지도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갑자기 지구가 더워지면서 적합한 와인산지가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있는 것이다.
수년전 빈에 갔을 때 그곳 와인들을 마시면서 놀란 적이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추운 지역은 전통적으로 화이트와인 생산지인데 의외로 맛있는 레드와인이 적지 않았다. 레스토랑 서버들은 자랑스럽게 레드와인을 권했고, 마셔본 결과 상당히 훌륭했다. 지구온난화 덕분에 화이트와인 생산지에서도 레드와인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과거 포도재배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추운 지역들- 영국, 덴마크, 벨기에,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에서도 최근 와인생산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2021년 스웨덴와인협회에 따르면 15개 지방자치단체에 와인산지가 분포해있고, 와인생산업체가 5년 동안 계속 늘어 64개에 달하며, 스웨덴 산 와인 레이블이 300개나 된다. 영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남부지역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샴페인 뺨치는 품질을 자랑하며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면 전통적으로 맛있는 와인을 생산해온 곳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보르도, 부르고뉴, 나파 밸리, 워싱턴, 피에몬테, 토스카나, 리오하… 우수한 레드와인 산지로 꼽혀온 이곳들은 안타깝게도 머잖아 품질 좋은 와인 생산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폭염과 가뭄 때문이다.
네이처(Nature)에 게재된 한 연구는 지구온난화로 세계 와인산지 중 70~90%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랑스 농업식량환경 연구소는 이번 세기 말까지 세계 72곳의 와인산지 가운데 64곳이 와인을 생산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포도나무가 싹트는 시기, 포도알이 영그는 시기, 수확기가 모두 50년 전에 비해 15~18일이나 빨라졌고 수확량은 점점 더 줄고 있으며 와인의 품질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파 밸리는 산불이 큰 문제다. 2017년 10월 소노마, 나파, 멘도시노에서 40명이 숨지고 5,600여개 건물이 전소된 산불(Tubbs Fire)을 기억할 것이다. 2020년 9월에 일어난 산불(Glass Fire)은 또 다시 1,500여 건물을 태우고 31개 와이너리에 큰 피해를 입혔다.
산불은 화재로 인한 직접 피해도 크지만 며칠이고 계속 날리는 재와 연기로 인한 간접피해가 더 무섭다. 늦여름 산불은 포도수확기와 겹치기 때문에 한창 무르익어가는 포도알에 재가 들러붙고 연기가 스며들면 섬세한 와인양조가 불가능해진다. 적지 않은 프리미엄 와이너리들이 2020년 빈티지를 아예 포기한 이유다.
이미 보르도와 나파에서는 카버네 소비뇽을 대체할 품종들을 실험적으로 심어보는 등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2천여년 역사의 보르도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카버네 소비뇽이 없는 보르도와 나파 밸리를 상상할 수 있을까?
지난해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지구온난화의 종식’을 공식 선언하고 대신 “이제 지구가 끓어오르는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글로벌 워밍이 아니라 글로벌 보일링 시대라는 무서운 선언이다. 세계기상기구(WMO)가 발표한 2023년 7월 데이터를 보면 지구 기온은 인류가 측정을 시작한 이후의 모든 기록을 깨뜨렸다.
머잖아 세계 와인지도를 다시 써야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한잔의 와인에도 지구온난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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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