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충동적이고, 자아도취에 빠진 사업가로 일관된 정책 아젠다를 갖고 있지 않다는게 일반의 생각이다. 헤리티지 재단의 2025 프로젝트에 참여한 140명의 스탭도 최근 그가 얼마나 충동적이고 일관성을 결여한 인물인지 통감했을 것이다. 자신의 재집권에 대비한 아젠다 설정작업인 2025 프로젝트가 논란을 빚자 트럼프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작업 내용은 물론 누가 참여하고 있는지 아는 바 없다고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러나 개인의 정치적 이익만을 좇아 움직이는 트럼프에게도 한 가지 확고한 신념이 있다. 지난 1987년 당시 뉴욕의 부동산 개발업자에 불과했던 트럼프는 10만 달러의 거금을 들여 뉴욕타임스에 공개서한 형식의 전면광고를 냈다. “국민 여러분께”로 시작되는 광고문은 지금 우리의 귀에 상당히 익숙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을 이용해 이익을 챙겼다”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동맹국들을 위한 막대한 방위비 지출로 미국이 골병이 든데 비해 군비 부담에서 벗어난 우방국들은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트럼프는 어떤 해법을 제시했을까? “일본, 사우디 아라비아와 다른 국가들”은 미국에 방위비 분담금을 지불해야 하며, 미국 정부는 이들 국가에 관세 형태로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트럼프가 지닌 세계관의 핵심이다. 이번 캠페인에서 그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품에 10%의 보편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산 수입물품에 60%의 추가 관세를 매기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방위공약과 관련해 트럼프는 GDP의 2%로 책정된 방위비 분담금을 지불하지 않는 나토 회원국은 보호받지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제 몫의 분담금을 내지 않는 나토 회원국에게는 ”러시아가 원하는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둘 것이라는 폭탄발언까지 내놓았다.
필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업가들에게 반시장적이고 성장과 안정에 역행하는 그의 아젠다를 선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트럼프는 짖는 소리만 컸지 정작 심하게 물지 않는 허풍꾼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미국의 우방국을 향한 적대감과 보호주의에 대한 강한 호감은 트럼프가 지닌 이념의 상수에 해당한다.
1980년대에 선보인 트럼프의 어두운 비전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과 유럽의 성장이 정체되고 중국이 급부상한 가운데 이 모든 상황을 헤치고 나온 미국은 199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GDP의 26%를 차지하는 수퍼파워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한때 유럽과 유사한 수준이었던 미국의 임금은 이제 45%의 우세를 보인다. 일본과 비교하면 임금차는 더욱 커진다. 미국의 평균임금은 7만7,000달러로 일본의 4만3,000달러를 한참 웃돈다. 프랑스와 같은 국가는 자국의 근로자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고, 일본과 독일은 조직적인 산업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정보시대에 날아오른 국가는 미국뿐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레이건과 클린턴 행정부는 일본의 질주를 막기 위해 온갖 종류의 조치를 취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이 정체의 수렁에 빠진 것은 정보혁명을 놓쳤기 때문이다.) 이같은 실패의 기록에도 아랑곳 없이, 트럼프는 중국을 상대로 효과를 입증받지 못한 조치를 다시 시도하길 원한다. 하지만 중국은 자체적인 실수로 이미 성장둔화기로 접어들었다.
지금까지의 기록은 분명하다. 트럼프의 주된 잣대인 무역적자 측면에서 보아도 중국에 매긴 관세는 실패로 끝났다. 관세 단행 이후 미국의 무역적자는 축소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됐다. 많은 연구보고서는 관세 조치로 미국의 소비자들이 수백억 달러의 추가 부담을 떠안게 되었고, 기대했던 중국의 정책변경은 나타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최근 연구는 트럼프의 새로운 관세가 미국 소비자들에게 연간 5,000억 달러,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는 연 1,700달러의 추가 부담을 안겨줄 것으로 결론지었다. 한 마디로 그의 관세정책은 인플레이션의 불씨를 되살리게 된다는 얘기다.
트럼프의 이념적 견해는 사실과 증거로 바꾸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아직도 관세를 중국을 비롯한 대상국가들이 지불하는게 아니라 미국의 소비자들이 부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트럼프의 주장이 맞다면 미국 혁명은 큰 잘못이었다. 당시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이 신대륙에서 수입한 물품에 부과한 관세에 격분했다. 만약 실제로 관세를 지불하는 쪽은 그들이 아니라 영국인 소비자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식민통치에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18세기의 경제학자들도 관세는 이를 부과한 국가의 국민이 부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혁명적인 일을 해냈다. 세계의 안정을 떠받치고 다른 국가들이 부유해지도록 돕는다면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공존·공영의 지역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 이처럼 계몽된 자기이익이라는 비전은 지난 80년간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을 이루었다. 트럼프와 JD 밴스는 이를 부인하는 대신 미국이 이룩한 가장 위대하고 오래 지속될 업적에 등을 돌리는 어둡고 편협하며 이기적인 비전을 선택하려 든다.
예일대를 나와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파리드 자카리아 박사는 국제정치외교 전문가로 워싱턴포스트의 유명 칼럼니스트이자 CNN의 정치외교분석 진행자다. 국제정세와 외교부문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석가이자 석학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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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드 자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