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칼날은 매서웠다. 증거가 차고 넘쳤다. “비자금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고 펄쩍 뛰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벼랑 끝에 몰렸다. 급기야 1995년 10월27일 그는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다. 눈물까지 훔치면서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약 5,000억 원의 통치 자금을 조성했고 쓰고 남은 돈이 1,700억 원”이라고 실토했다. 소문만 무성했던 비자금의 실체와 그 규모가 대통령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된 순간이었다. 징역을 살았던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2,628억 원)을 16년을 끌면서 완납했다.
충격 속에 잊혔던 노태우 비자금이 다시 등장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재산 분할 소송 중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측이 노 전 대통령의 배우자인 김옥숙 여사가 자필로 쓴 ‘맡긴 돈’ 리스트를 공개하면서다. 노란색 포스트잇에 적힌 ‘김옥숙 메모’ 2장에는 선경 300억 원 등 총 904억 원의 맡긴 돈 내역이 여러 실명과 함께 적혀 있다. 2심 재판부는 비자금의 확인 절차도 없이 메모가 신빙성 있다고 판단해 1조3,808억 원의 재산 분할을 결정한다. 노 전 대통령 비자금 300억 원이 태평양증권 인수 때 사용되는 등 SK 성장 과정에 유·무형의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최 회장 측은 강하게 반박했다. 심지어 “태평양증권은 계열사 부외 자금으로 마련했다”고도 했다. 계열사가 모은 비자금으로 태평양증권을 인수했다는 얘기다. 실토한 SK 비자금에 대해서는 2심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1965년 선경직물에 입사한 뒤 SK그룹의 회장까지 역임하고 2004년 물러난 손길승 전 회장의 기억도 같다. 손 전 회장은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선경·유공해운·유공가스 등으로부터 한 달에 걸쳐 수십억 원씩 사채시장과 증권사를 통해 비자금을 충당했고, 10만 원 수표 1만 장을 만들어 서성환 태평양증권 회장께 직접 전달도 했다”고 말했다.
맞서는 양측의 주장과는 별개로 904억 원의 노태우 비자금이 등장하면서 ‘최태원·노소영 재판’은 이제 개인의 영역을 넘어섰다. 국가 공권력에 맞서 비자금을 숨겨왔던 세력과의 2라운드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정부가 비자금의 실체를 규명해야 할 명분도 차고 넘친다.
무엇보다 ‘김옥숙 메모’가 노태우 비자금이 맞다면 사법 당국은 대통령의 자리까지 꿰찬 정치인에게 농락당했다. 대검 중수부는 노태우 비자금 230억 원이 사돈인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에게 전달된 사실을 확인한다. 검찰은 사돈 기업인 SK그룹에도 비자금이 전달됐을 것으로 보고 소환 조사와 계좌 추적, 압수수색 등 대대적 수사를 했다. 하지만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도 30년 만에 등장했다. ‘김옥숙 메모’가 맞다면 비자금 세력은 뒤에서 얼마나 그 공권력을 비웃었겠는가.
자칫 ‘성공한 비자금은 처벌할 수 없다’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 노태우 비자금 300억 원은 30여 년 만에 46배(1조3,808억 원)로 부풀려져 그 자녀의 몫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성공한 비자금이 세월이 흘러 후대에 막대한 유산을 남긴 것이다. 범죄를 합법화해 제2, 제3의 케이스가 쏟아질 것은 자명하다. 국가가 범죄의 방식을 알려주고 양산하도록 방치해야 되겠는가.
‘악마의 증명’ 덫에 빠지는 것도 막아야 한다. 최 회장 측은 비자금 300억 원의 정확한 전달 방식 및 사용처, 100억 원 약속어음의 구체적인 처리 결과 등을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 한 푼의 비자금이 유입되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악마가 아니다’를 증명할 수단은 제한적이다. 공권력을 쥔 정부 이외에 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나마 국세청의 움직임은 감지된다. 강민수 신임 국세청장은 국회 업무보고에서 “재판에서 나온 것이든 소스가 어디든 과세해야 할 내용이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김옥숙 메모’는 30년 전의 비자금을 증명할 수단이 없을 것이라는, 노 관장 측의 계산된 승부수였을 게다. “비자금은 맞지만 ‘불법 자금’이라고 볼 증거는 없다”고도 주장한다. 교묘한 빠져나가기다. 쏘아 올린 공이 이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 다만 사법 당국이 비자금 세력에 비웃음을 받아가면서 또 농락당해서야 되겠는가. 비자금의 진위와 실체, 흐름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하는 것이 늦었지만 공권력을 바로 세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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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균 서울경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