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덕 칼럼] 회색코뿔소와 ‘끓는 물 속 개구리’
2024-08-01 (목)
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실장·부사장
“앞으로 ‘블랙스완’과 ‘회색코뿔소’ 사건이 수시로 발생할 수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중국 공산당 20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 결정문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꺼낸 위기론이다. 블랙스완(검은 백조)은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일단 일어나면 엄청난 충격을 가져오는 위험을 말한다. 회색코뿔소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위험을 뜻한다. 코뿔소는 몸집이 커서 멀리 있어도 눈에 잘 띄고 진동만으로도 움직임을 느낄 수 있지만 코뿔소가 달려오면 두렵거나 대처 방법을 알지 못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동물’ 비유를 동원한 것은 미국의 대중 봉쇄, ‘피크 차이나’로 불리는 성장률 내리막길, 대만해협·남중국해의 긴장 고조 등 경제·안보 리스크를 절감한다는 의미다. 중국 지도부는 이번 회의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과의 증폭되는 갈등에 맞서기 위해 경제·기술·군사력 강화에 주력하기로 뜻을 모았다.
전 세계가 블랙스완 또는 회색코뿔소 같은 위기를 맞고 있다. 신냉전·인공지능(AI) 시대 진입과 함께 글로벌 경제·기술 패권 전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각국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특히 전통 강국 미국과 신흥 강국 중국 간의 패권 경쟁이 국제 질서 재편을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은 국력을 다시 일으키고 자국민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사퇴로 요동치는 대선 레이스에서 유권자의 최대 관심도 ‘어느 후보가 미국을 더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느냐’에 맞춰지고 있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나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모두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이유다.
해리스 부통령이 당선돼 중국에 대한 무역장벽을 높이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을 계승할 경우 대중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 제조업도 충격을 받을 수 있다. 2019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법인세율을 35%로 인상하자고 주장했던 해리스가 다시 법인세 증세론을 내세울 경우 미국 현지에 투자한 우리 기업들의 부담이 커질 게 분명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더 거센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예고했다. 트럼프는 모든 수입품에 대한 ‘10%의 보편관세’를 공약한 데 이어 중국 자동차에 대해선 “약 100~200%의 관세를 부과하면 미국에서 팔지 못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트럼프는 “많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잘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김정은 정권과 잘 지낼 것이라고 공언했다.
무역 의존도가 높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운명은 미국 차기 행정부의 정책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해리스나 트럼프는 모두 국제정치에서 ‘이상’보다는 ‘현실’을 강조하면서 국익·실리·힘 등을 중시한다. 우리가 대외 변수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힘을 키우고 경제·안보 방파제를 튼튼히 쌓아야 한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러시아와 밀착하면서 핵·미사일 고도화를 시도하고 탄도미사일 발사와 쓰레기 풍선 살포 등 다차원의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우리가 경제·안보·정치 등 다층 복합 위기를 극복하려면 국민 통합과 국력 결집으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정치권은 민심과 소통하고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국가 과제 해결을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여야는 본래 책무를 내팽개치고 연일 당 안팎에서 진흙탕 싸움만 벌이고 있다. 4·10 총선에서 참패한 뒤 7·23 전당대회에서 후보들 간에 막가파식 비방전을 벌인 국민의힘은 반성도 없는 ‘콩가루 여당’이란 비아냥을 듣고 있다. 8·18 전당대회 지역 순회 경선에서 이재명 전 대표가 91.7%의 득표율을 기록한 더불어민주당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1인 사당(私黨)’임을 드러내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바깥 세상 변화에 대해 애써 눈을 감은 채 위기 불감증에 빠져 권력 싸움만 벌이니 ‘우물 안 개구리’를 넘어 ‘끓는 물 속 개구리’ 같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개구리가 점점 따뜻해져 끓게 되는 뜨거운 물에 들어가게 되면 위험한 줄 모르고 있다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회색코뿔소 위기 등에 슬기롭게 대처해 기회를 만들어내려면 정치권부터 개구리 같은 한심한 행태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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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실장·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