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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문화는 일류, 정치는 4류

2024-07-29 (월) 조철환 한국일보 오피니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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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9월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내놓은 세계 100대 기업(시가총액 기준) 명단에는 5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1위 NTT(2,768억 달러)는 2위 IBM(760억 달러)보다 3배나 기업가치가 높았다. 1980년대는 일본의 황금시대였고, 경제발전 전략에서 한국의 스승이었다. 1983년 삼성 창업주가 반도체 투자를 선언한 곳이 역동적 분위기의 도쿄였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일본 중장년층은 영광의 시기를 ‘푸른 산호초‘라는 가요로 기억한다. 18세 단발 여가수 마쓰다 세이코가 1980년 내놓았는데, 청량한 음색이 돋보이는 곡이다. 그런데 지난달 26, 27일 한국의 걸그룹 뉴진스의 멤버 하니가 도쿄돔 팬미팅에서 이 노래를 불러 큰 호응을 얻었다. 현지 언론은 “공연이 끝난 후에도 여운이 짙었으며 도쿄돔은 고양감에 휩싸였다”고 전했다. 뉴진스 멤버들은 공연이 끝난 뒤 일본 TV 프로그램에까지 출연했다. 일본은 물론 한국의 소셜미디어에서도 하니의 열창은 실시간 트렌드로 검색됐다.

하니가 ‘푸른 산호초’를 부른 그날 우리 국회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발의를 요구하는 국민동의 청원이 법사위에 회부됐다. 회부 요건인 ’30일 이내 5만 명 이상 동의‘를 충족한 데 따른 조치다. 법사위는 위헌 논란 속에 관련 청문 절차도 진행 중이다. 흥미로운 건 탄핵 사유. 다분히 감정적인 탄핵 사유에는 ‘후쿠시마 핵폐수 해양투기 방조’ 등 대일 굴욕외교도 포함됐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최근 방류 후 원전 인근 해변을 조사한 결과 방사성 핵종인 삼중수소 농도가 일본 자체 기준치를 밑돌았다고 밝혔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자란 복수국적의 하니가 한국 걸그룹 멤버로 일본 사회에 1980년대의 향수를 자극한 건 K팝의 글로벌 경쟁력만 보여주지 않는다. 일본이 주춤하는 사이 우리가 이뤄낸 성취를 드러낸 것인데 여전히 후진적인 한국 정치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1995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베이징에서 “기업은 2류, 정치는 4류”라고 말했는데, 30년 가까이 지났어도 한국 정치는 여전히 3류도 아닌 4류에 머물고 있다. 뜬금없는 일련의 탄핵 논의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줄 뿐이다.

<조철환 한국일보 오피니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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