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슈] ‘힐빌리’ 밴스

2024-07-24 (수) 이성현 조지 HW 부시 미중관계기금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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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안의 아이는 잘 때 파자마를 입지 않는다. 낮에 입었던 바지를 그대로 입거나 속옷 차림으로 잔다. 이는 미국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J.D. 밴스 상원의원의 회고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는 오하이오주 쇠락한 공업지대에서 흙수저로 자라면서 일찍이 세상 현실에 눈을 떴다. 그런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보고 ‘미국판 히틀러’(America’s Hitler)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그러던 그는 갑자기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로 돌아섰고, 결국 트럼프의 러닝메이트가 됐다. 트럼프를 지지하게 된 이유를 묻자 “트럼프의 진면목을 다시 봤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그가 다시 본 것은 그것만이 아니라, 트럼프를 이용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신분 상승의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회고록에는 ‘나의 힐빌리 터미네이터, 마마우와 파파우를 위하여’라는 헌사가 있다. ‘마마우(Mamaw)’와 ‘파파우(Papaw)’는 미국 남부와 애팔래치아 지역에서 흔히 사용되는 조부모에 대한 애칭이다. 이러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밴스는 자신의 힐빌리(촌뜨기) 뿌리와 자신의 성장 배경에 대한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밴스는 지금도 파자마를 입는 것을 ‘엘리트층의 사치’로 여긴다.


그의 책은 개인적인 서사인 동시에 미국 기득권층이 잘 감지하지 못했던 저소득 백인 노동계층 커뮤니티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문제들, 예를 들어 전통적 가족의 붕괴, 사회 인프라 쇠퇴, 약물 중독, 가난의 되물림 등에 대한 통찰력으로 미국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저소득 백인 노동계층은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중요한 유권자 그룹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밴스가 과연 ‘기회주의적 정치가’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트럼프의 정책에 대해 밴스가 얼마나 진정으로 공감하느냐, 그리고 그가 트럼프 다음으로 미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다. 이번 부통령 후보 지명으로 인해 밴스는 벌써 공화당 내 존재감 서열이 수직 상승하는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다. 그가 부통령이 되면 자연스럽게 차기 공화당 대통령 후보 1순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각과 정책 방향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됐다.

트럼프 반대에서 지지로 선회한 이유에 대해 그는 “본질적인 측면보다는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아예 트럼프를 “내 생애에서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웠다. 사실 그는 정책적인 면에서 트럼프와 유사하다. 심지어 미국 우선주의, 낙태 문제, 보호무역주의, 반이민 정책, 외교 분야에 우파를 초월한 ‘극우’적 성향을 보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나는 우크라이나에 무슨 일이 발생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극우적 성향 때문에 트럼프와 친한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과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조차도 트럼프에게 전화해 밴스의 지명을 끝까지 반대했다는 후문이다.

작금은 한국이 우려하는 4년의 ‘트럼프 리스크’가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그 후에 ‘밴스 리스크’ 4년이 온다면 한국이 직면할 미국발 리스크는 지난 한미동맹 70년과 그 전개가 매우 다를 것이다. 외교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이성현 조지 HW 부시 미중관계기금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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